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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Jul 14. 2023

말씀이 타오르는 마음에는

St. FrancisXavier's Church, Nuwara Eliya

스리랑카에서는 어느 성당에 가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성인들이 있다. 기적을 허락하는 성 안토니오 (St. Anthony), 해외선교의 수호성인이자 동방 선교의 사도이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St. Francis Xavier) 그리고 그 신앙의 씨앗을 실론에 뿌리내린 성 요셉 바즈 (St. Joseph Vaz) 성인이다. 실상 신앙과 연결된 모든 곳에 이분들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도 자주 만나 뵙다 보니 이젠 내적 친밀감이 생길 정도로 가까운 존재로 느껴진다.

북부주에서 만난 하비에르 성인                                                                   물 위의 안토니오 성인

누군가에게 빛이 되는 삶 


그중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무려 예수회 창립 일원인 하비에르 성인은 교황 바오로 3세가 1540년 예수회를 정식 승인함에 따라 인도를 시작으로 일본 중국까지 스스로를 태워 동방을 비추는 선교자가 되셨다. 스리랑카엔 1544년 북부 자프나 지역 13개 마을에서 1만 명이 넘는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혹자는 그리스도 문화를 식민의 잔재라 비판하지만 하비에르 성인은 가난한 이와 병자를 찾아 돌보는 일을 가장 먼저 하셨다. 모든 교리를 현지어로 번역해서 가르치고 당시 포르투칼 사람들의 삶을 비판하고 교정한 성인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땅에 사랑과 희생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누워라엘리야로 향하던 여행길. 그 길 위에서도 하비에르 성인을 우연히 만났다. 숙소인 St. Andrew 호텔로 들어가는 길목 중앙에 자리한 St.Francis Xavier Church. 오갈 때마다 거쳐가다 보니 그저 지나칠 도리가 없었다. 해발 1,800m의 고원지대라 쌀쌀해진 온도, 비까지 내리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잠시 몸을 녹일 겸 그렇게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미사가 집전되고 있었고 성전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온전히 미사에 집중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성당 내부만 둘러보기로 했다. 성당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무려 1838년에 지어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성당 바로 옆에는 성 하비에르 고등학교 (St. Xavier's College) 도 함께하고 있다.

"Everychild has rights to Education."

아직 빗방울이 가시지 않은 작은 정원엔 올망졸망한 꽃들과 풀잎향기가 가득하다. 동굴 위 성모님을 뵙고 인사를 올린다. 비가 개이고 반짝 파랗게 피어난 하늘 아래 하비에르 성인께 인사를 드리고 나니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그저 잠시잠깐 머무는 것을 인자하게 허락해 주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한국에서는 하비에르 성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한국 교회는 전 세계의 유래가 없는 자생교회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부끄럽게도 그만큼 신앙을 공부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오랜 일기장 같은 성당 


한국에도 하비에르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성당들이 있다. 그중 도화동성당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왔다. 지금은 송도로 이전했지만 엄마의 학창 시절이 녹아있는 박문여고 자리 앞에 있어 언젠가 들었던 적이 있어서였을까? 이제 인천교구 교구청으로 바뀌어 학창 시절 양 갈래머리 소녀인 엄마가 뛰놀던 교정을 이젠 볼 순 없지만 그 자리가 주는 여운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미사시간에 맞춰 성당에 도착한 토요일 오후. 성전에서 나오시는 자매님 한 분이 이번주부터 시간이 바뀌어 지금 막 미사가 끝났다고 알려주신다. 엄마는 오랜만에 눈앞에 펼쳐지는 익숙하고 정겨운 풍경에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떼지 못하신다.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인 성모님 앞에 봉헌 초를 켜고 기도를 드리고 앞마당을 한번 둘러보는 사이 그만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혀 버렸다. 멀리서 왔는데 성전 내부도 보지 못하고 가기엔 너무 아쉬운지라 용기를 내어 성당 사무실에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다행히 내부 방침상 안되지만 잠시 기도하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눈에 마음에 성전을 담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성 방지거 사베리오

감사하게도 따뜻한 미소가 표정 가득 피어나는 성당 관리장님이 직접 안내해 주셨는데 깜깜한 성전을 환하게 밝혀주신 덕분에 잠깐이지만 고요 속 성전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작지만 아늑하고 포근한 품 속에 안겨있는 듯 정겨운 성전 안에서 관리장님은 우리가 그냥 놓치고 갈 수 있었던 보물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꺼내 놓으신다. 성당 옆에 있는 교육관 자리가 무려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신앙의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가 살던 터전이라는 것. 그는 20여 년간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며 153명 순교자의 행적이 밝힌「박순집 증언록」을 남겼고, 이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신앙의 터전을 일궜다. 엄마는 작은 성수대마저 학창 시절 자주 찾았던 성전 모습 그대로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세월이 지나도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재대 밑 조선 4대 교구장 뵈르네 주교님과 무명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


깨달음의 길 


누워라엘리야 성 하비에르 성당을 나서기 전 성당내부에서 보았던 엠마오의 길이 오래 마음에 붙잡았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걷는 실의에 찬 존재들. 그들은 함께 다가와 걷는 한 낯선 동행자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 더디 믿는 자들의 가리어진 눈이 말씀 속에 트이고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나에겐 이 그림이 오늘의 말씀이었다.


말씀이 타오르는 마음에는 할 일이 있다.


소소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여정에 감사하며 착실히 기록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새롭게 느낀다. 평신도 사도직을 통해 한국교회의 숭고한 순교자들을 기록하고 증거 했던 박순집 베드로의 삶 그리고 이 성전 안에 피어난 이야기가 다시 한번 용기가 된다. 말씀이 타오르는 마음에는 할 일이 있다. 나에게는 할 일이 있다. 언제나 귀를 열고 길 위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성실히 기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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