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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May 06. 2023

주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Church of Our Lady of Fatima_혜화동 성당

타지 생활도 일 년 반이 넘어서니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나는 해외 의료지원 보험에 가입되어 수도에서 가장 좋은 사립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영국에서 수련받은 의료진과 잘 갖춰진 의료장비들 덕에 마음만 먹으면 제약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인인 나에게도 다소 부담스러운 진료 청구서를 받아 들고나니 문득 현지 공공 의료 서비스의 현실이 궁금해졌다. 날로 심해지는 경제위기로 병원엔 기본 의약품 조달도 어렵다는데, 의료 사각지대 사람들은 아플 땐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성모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 


당장 생계를 잇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픔 몸은 더 아픈 차별을 낳는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더 약한 사람들에게 취약해서, 더 자주 아프지만 먼저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공립 병원 약제비도 부담스러운 요즘 마음 편히 찾을 수 있는 병원이 있는지 찾다 보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Fatima Free Clinic. 콜롬보 인근에 있는 무료 병원으로 누구든 상시적으로 찾아와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었다. 그 옆엔 같은 뜻을 품은 듯한  Church of Our Lady of Fatima도 함께 자리한다.


모든 이가 자유롭게 오가는 열린 모두의 장소에서 가장 필요한 손길을 먼저 내어주는 곳.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성당을 찾은 날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내리쬐는 햇볕에 눈이 부셔 잠시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두리번거리자, 입구 어귀에 보이는 순백의 성모님이 길을 안내해 주신다. 그렇게 성모님을 보고 골목을 쭉 따라 들어서면 색이 바랜 병원 간판이 보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큰 성전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사회사목 공동체들의 이름도 눈에 띈다. 아누다라푸라의 보라색 성당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익숙한 오블라띠회 그리고 반가운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드 성인도 계신다. 


주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곳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오블라띠 선교수도회 (Missionary Oblates of Mary Immaculate)의 스리랑카 대표 수도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화를 실천하는 산실과도 같은 곳이다. 1848년부터 시작해 2023년까지 이 땅에서 176주기를 보내며, 가장 낮은 곳에서 울부짖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을 오블라띠 하고 있다 (오블라띠의 어원은 '봉헌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오블라투스 (Oblatus)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며 따르는 신자들의 사랑과 정성도 이 공간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혼배미사 준비로 한창 바쁜 성전 내로 들어서니 성전의 깊고 넓은 공간감이 나를 압도한다. 벌집을 연상시키는 육각 돔 그리고 직물처럼 가지런히 짜인 기하학적 지붕 위로 한낮의 햇빛이 끝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스테인글라스 하나 없이도 성당이 주는 빛의 미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성전 곳곳에 놓인 자색 깃발은 아직 기다림의 시간임을 보여주지만 기쁨의 부활을 기다리며 소리 높여 마음을 봉헌하는 가족이 눈에 띈다. 에우제니오 성인 발 밑에서 한참을 노래하듯 읊어 내려가던 시 구절 같은 기도까지... 이곳에서는 어쩐지 간절하고도 절절한 신자들의 기도소리가 유난히 귓가를 맴돈다.

한국에도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며 존재하는 공간들이 있다. 길 위에 선 건강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요셉병원 그리고 성북동에 가면 매주 일요일 이주 노동자들에게 무료진료를 하는 라파엘 클리닉이 있다. 현업에 종사하면서도 주일 자신의 귀한 시간을 내어놓는 의료 봉사자들로 운영된다. 라파엘에서 조금 걸어 내려오다 보면 혜화동 성당 그리고 필리핀 장터도 만날 수 있다. 먼 타지에서 온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만나 혜화동 성당에서 미사도 드리고 음식도 나눠 먹을 수 있는 정겨운 울타리가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들어선 혜화성당은 성당 마당부터 어쩐지 정겹다. 혜화역에서 오래 직장생활을 해서 이곳은 언제나 일상 속에 작은 쉼이 되는 곳이다. 이끼가 낀 태초의 에덴동산을 보는 듯한 제단 위 모습도 여전하고 성전 가득한 성미술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조각가 김세중 작가님의 '위로의 어머니 상'은 언제 만나도 참 깊고도 숭고한 울림을 준다. 자신을 내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세상에 내놓는 어머니의 마음이야말로 어쩌면 봉헌하는 삶의 또 다른 의미가 아닐까? 


고요함 속에 랑카 파티마 성당에서의 기도 소리가 또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하다. 성당 안팎을 꼼꼼히 보고 돌아온 자리에도 오랜 기도를 하시는 자매님이 계시길래 나도 옆에 앉아 함께 묵주기도를 드렸다. 많은 것을 가져야만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내가 가진 것 중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봉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하더라도 동경의 마음이라도 조금씩 그 숭고한 삶을 닮아가고자 오늘도 나를 깨운다. "주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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