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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Nov 01. 2021

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214.

그들은 어른의 삶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나는 내 삶에 의미가 있다는 희미한 분위기라도 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콜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 '나'는 문예창작 합평 수업에서 교수와 동료들에게 혹평을 받던 중 유일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지지해주는 빌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의 합평 제출작을 다시 꼼꼼히 읽어본 후 빌리의 재능을 동경한다. 이 일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진 두 사람. '나'는 바텐더로 일하며 바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빌리에게 자신의 집에서 동거를 제안하고, 거절하는 빌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상적일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동거는 점점 '나'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을 띠어 가고 있었다. 









소설은 중년의 '나'가 1996년부터 97년에 이르기까지 채 2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폭풍처럼 지나온 성장통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인 소설 초반부에 나는 이미 이 소설에 훅 이입되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이입되어 있던 것이겠지만. 어느 집단 혹은 조직에 한 명 쯤은 있을듯한 인물 '나'는 그 시절 내 모습과 많이 흡사하다(심지어 그가 회상하는 그 시기에 나와 주인공의 나이도 비슷하다). 상류층이라고 하기에는 경제 능력이 부족하고, 그러나 가난하다고 할 수 없는, 경제적 이점과 부모의 적당한 관심을 받고 자란, 한마디로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자란 부류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집단이든 제대로 속하지 않은 채 경계에 머무르는 불청객을 자처하고 남들에게 속내를 잘 내보이지 않으며 적당한 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나는 주인공 화자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가 그러한 모습의 스스로를 불편해 한다면, 나는 자발적이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작가라면 인생에 있어 결핍과 고통이 따라와야 하고 그로인해 남다른 예술적 감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나'에게 빌리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작가 지망생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중서부 소도시 출신으로서 바텐더로 일하며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고 심지어 남다른 재능까지 갖춘 빌리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배려하면 영혼의 동반자 관계를 영원히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십 년이 넘는 성장 배경의 차이는 불과 몇 달 만에 두 사람의 사이를 벌려놓는다.  



비록 대고모의 아파트를 불법 전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제법 큰 평수의 아파트에 기거하고 학비와 생활비는 아버지로부터 지원받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는, 지적 수준과 예술적 교양을 갖추고 있고 민주당을 지지하며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 스스로 생계와 학비를 모두 책임쳐야하고 '나'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경제적 이유로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사교성, 그리고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가진 빌리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며 적당한 처세술을 갖춘, 마초적 성향이 강한 남성이다.    



자기에게 없는 작가적 요건을 두루 갖췄다고 여긴 빌리와 소울메이트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긋난다. 여러 면에서 비교할수록 커져가는 좌절감과 무엇보다 습작에서 오는 열패감은 '나'의 일탈을 부추기며 일상을 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사과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여겼던 작은 사건이 그 둘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나'는 빌리가 왜 그토록 싸늘해졌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차하리만치 빌리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만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지 작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의 성장통에 멈추지 않는다. 소도시의 가난한 출신으로서 상류층을 비난하면서도 보수당을 지지하며 사회적 약자층을 혐오하는 빌리의 모습은 우리나라 선거철에서도 볼 수 있다. 사회 기득권층이 주류를 이루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경제적 약자들이 다수를 이룬다. 진보당이라고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복지에 대해 언급하면 세금 인상과 포퓰리즘을 운운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계층 또한 이들이다. 부동산세나 가산세 등 자신들에게 전혀 해당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빌리가 강한 남성성을 과시하듯 내세우며 소수자들을 비하하고, 더불어 섬세하고 예민한 '나'를 조롱거리로 삼으며 냉소를 던지는 모습 역시 우리 사회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타고난 사교성과 외모와 재능으로 빌리 역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나'의 말은 어떤가? 심지어 '나'가 자신의 부족하지 않은 경제력에 대해 예술가로서 죄책감을 가졌다면, 빌리는 자신의 타고난 이점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맹점이기도 하다. 이렇듯 소설은 두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모순을 담아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소설의 초반부였다. 스무 쪽이 넘어가도록 나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가 여성이라고 단정했다(그래서 더 이입했었던 것이지도 모르고). 이 무슨 고정관념인가. 두 주인공이 남성인 소설에서 감정선을 이토록 섬세하고 면밀하게 다룬 작품을 그동안 만나본 적이 있었나싶다.  



그렇다면 소설의 결말은 어떨까. 스물네 살의 '나'는 자신들의 덧없는 청춘을 언젠가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두 사람은 격동같았던 두 해의 청춘을 그리워할까? 책을 덮은 후 여운이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책 표지를 보면 그 쓸쓸함이 잔물결처럼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한 치의 아쉬움이 없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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