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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Jan 28. 2021

디 에센셜 _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석 장의 사진.

한 장은 유년 시절이다. 정원 연못가에서 여자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보기 흉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섬뜩하고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애당초 웃는 얼굴이라고 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은 그저 주름투성이 도련님, 그저 원숭이일 뿐이다.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은 교복 차림이다. 이번에도 역시 웃고 있다. 깊이와 충실감이 없는, 깃털처럼 가볍고 종이 한 장같은 웃음.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듯한 느낌이다. 또 다른 사진에서 남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몹시 더러운 방 한 쪽 구석에서 작은 화롯불에 양손을 쪼이고 있는데, 이번에는 웃고 있지 않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그냥 그대로 죽어간 것 같은, 기분 나쁘고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사진이다. 마냥 역겹고 짜증나고 눈길을 돌리고 싶어지는 얼굴.  


요조다.

지금까지 그렇게 기묘한 얼굴의 남자를 본 적 역시 한 번도 없다. 







유복한 집에서 성장한 요조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익살을 통해 자신을 숨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집에서 나와 타향 생활을 하게 된 요조는 어느덧 익살이 몸에 배어 남을 속이는데 능숙해졌다.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겠다고 마음을 놓으려던 참에 백치라고 여겨질 만큼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다케이치라는 학생이 요조의 익살의 정체를 간파한다. 그로인해 요조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한다. 


144.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참 행운아라는 말을 정말이지 자주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146.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150.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뭔가를 훔치듯이 쭈뼛쭈뼛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 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택일하는 능력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157.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때부터 무슨 짓을 하든 다케이치가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자신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퍼뜨릴 거라는 생각에 요조는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다케이치로부터 예언 아닌 예언을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미술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도쿄 고등학교에 합격하고 기숙사 생활에 들어갔으나 폐결핵 진단을 받고 우에노에 있는 아버지의 별택으로 옮긴 후 거의 혼자 생활하며 제대로 등교도 하지 않은 채 학교를 마친다. 


화방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요조는 호리키 마사오라는 미술 학도와 교제하는데, 그는 호리키의 처세술과 사교성, 제멋대로인 듯한 자유로움, 타인과의 사이에서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의 성정을 대리하듯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익살꾼을 자처하는 행동에 끌리고, 무엇보다 호리키를 만나고 있으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되어 어울려 다닌다.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도쿄의 집을 팔자 요조는 자연스럽게 낡은 하숙집으로 이사하게 되고 그때부터 돈에 쪼들리기 시작하는데 가족의 도움 없이는 혼자 생활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각성한다. 학업도, 그림도 거의 포기한 채 살면서 우연히 알게 된 쓰네코와 하룻밤을 보내고, 취객조차 업신여기는 그녀를 보면서, 요조는 그녀에게 동질감과 연민, 사랑을 느낀다. 쓰네코 역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사람이었고, 지갑에 고작 동전 세 닢 뿐이라는 사실에 처량함과 굴욕을 느낀 요조는 쓰네코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지만, 요조만 살아남고 그 일로 생가로부터 의절당하다시피 외면당한다. 


163.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72.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거나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전수받은 저는 예의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눌러 감추고 감추어 온 내 정체다. 



학교에서 쫓겨난 요조는 아버지 대신 보증인 역할을 해준 시부타의 집 2층 방에 칩거하게 되고 조잡한 잡지에 만화를 그리고, 고향에서는 극히 적은 돈을 시부타에게 송금할 뿐 가족과의 연결은 완전히 끊어졌다. 거기에 시부타는 자살을 우려해 요조의 외출을 단단히 금지했다. 사실 고향에서는 학교에 다시 다닌다면 생활비를 좀 더 넉넉하게 보내준다는 의사를 시부타를 통해 전달했지만, 그가 에둘러 말하는 바람에 요조는 오해를 하고 만다. 자신의 갱생 자금을 시부타가 지원해 주겠다는 것으로 알아들은 요조는 그날로 그 집에서 친구네 집에 다녀온다는 거짓말을 하고 나온다. 아무하고도 교제가 없고,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는 요조가 떠올린 사람은 호리키였고, 그를 찾아갈 생각을 하자니 요조는 왠지 처절한 느낌이 들었다. 


224.

안팎 구별 없이 그저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인 저만 완전히 뒤에 쳐져 호리키한테조차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당황했고 칠이 벗겨진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싶을 뿐입니다.  



호리키의 집에서 우연히 마주친 잡지사 기자 시즈코와 동거를 시작한 요조는 시즈코가 출근한 후에는 그녀의 어린 딸 시게코와 집을 지켰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지만, 무일푼에 얹혀 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강한 상실감과 자기가 그린 그림을 시즈코에게 하루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다는 초조함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시즈코의 주선으로 잡지사에 만화를 그리게 된 요조. 수입이 생기면서 주량이 늘어 거친 술꾼이 되어 가고, 돈이 모자라 급기야 시즈코의 옷가지를 전당포에 잡히는 지경이 된다. 여느날과 다름없이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던 요조는 방문 앞에서 모녀의 대화를 듣게 되고, 두 사람의 행복을 자신이 곧 깨고 말거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집을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230.

내가 얼마나 모두를 무서워하는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나를 좋아해 주고, 남들이 나를 좋아해 줄수록 나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만 하는, 저의 이 불행한 기벽을 시게코한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233.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것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습니다.  



시즈코의 집을 나와 머물게 된 곳은 교바시의 스탠드바의 2층 방. 닥치는 대로 만화를 그리고 술을 마시며 되는 대로 사는 요조 앞에 나타난 어린 처녀 요시키. 그녀와 결혼해 작은 방을 얻어 함께 살면서 요조는 안정을 찾는다. 어느날 목격한 요시키의 외도. 그날 밤부터 요조의 머리에서 새치가 나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감도 잃고 점점 더 한없이 인간을 의심하며 삶에 대한 일체의 기쁨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모르핀에 중독되고 약방 여주인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이어지면서 자괴감을 느끼는 요조가 느끼는 세상은 지옥이었다. 시부타의 권유로 입원을 결정하고 아내와 요시키까지 동행해 요조가 제 발로 걸어들어 간 곳은 요양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이었다.  


인간 실격.

이제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요조가 아비규환의 인간 세계에서 단 한 가지 느낀 것은, '모든 것은 지나간다' 뿐이다.  









태생적으로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데 힘들고 두려워 하는 요조. 그는 신용하지 못하는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익살'이라는 가면을 쓴다. 가면 뒤에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본질을 들킬까 항상 긴장했던 요조. 하지만 발버둥 치듯 애쓰는 그의 노력은 누군가로 인해, 혹은 어떤 계기로 인해 좌절되고, 어린 아내의 외도로 인한 충격에 폐결핵까지 더해져 그는 벼랑 끝까지 몰린다. 진통제로 사용했던 마약에 중독 되면서 믿었던 이들로부터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자, 자신은 인간으로서 '실격' 됐다고 말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인간 실격>은 네 번의 자살 시도, 다섯 번째 자살로 삶을 마감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열일곱 살에 첫번째 자살을 시도하고 그가 생을 마감한 나이는 서른 아홉. 사람이 갖고 있는 가장 약한 부분만을 안고 살았고, 순수했고, 여렸고, 무엇보다 과하게 착했던 사람이 쓴, 생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완성작이다. 


소설 속 요조의 모습은 유난스러워보일 수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한 내면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다. 요조는 세상에 동화하기 위해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현대인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산다. 친구, 직장 동료, 선후배, 거래 관계 등 이득을 위해, 생계를 위해 혹은 감정소모를 피하기 위해 가면쓰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듯, 우리는 싫다는 거부 의사조차 쉽게 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뿐인가. 누군가의 노래 가사처럼 SNS에서 불행한 사람은 없다. 요조가 다케이치로부터 자신의 꾸며진 익살을 간파당한 후 사람들에게 들통날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비단 세상에 동화되지 못한 요조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웃음과 치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진을 찍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일상을 연출해 올리며, '좋아요'로 소득을 올리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을 꾸며 자극적인 정보를 흘리는 세상에서 신뢰의 기저가 작동하기 어렵다. 요조가 요시코의 외도로 받은 충격은 정절보다 신뢰에 있다. 작가는 당시 일본 사회의 체면과 돈으로 환산되는 인간 관계의 진실없는 허위성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향한 냉정함을 꼬집고 있다. 


1909년에 출생해 1948년에 사망한 다자이 오사무가 살았던 일본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전쟁 시대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심성이 유약한 남성은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건장한 체격에 강인한 정신력과 애국심, 그리고 전후에는 처세에 능해 가족을 굶주리지 않게끔 충실한 가장의 역할을 하는 남성만이 인정받는 시대에서 요조는 남성 세계에서도, 그렇다고 여성 세계에서도 존재 가치를 확인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로써 전락한 사람들을 대변한다. 이는 요조가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도망쳐 안정을 찾는 곳은 백치 혹은 미치광이라고 여기는 창녀의 품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계층으로서 이들 또한 온전히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가 음지의 사람과 범인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일 것이다. 또한 요조가 마르크스주의에 동참한 것도 이념이나 사상보다는 그들이 아웃사이더라는 데에 더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요조가 자살미수 후 정신이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과연 어느 집일까? 어쩌면 집단 안에서의 한 개인이 아닌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이 가능한 그 어느 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의 첫 장면에 나오는 세 장의 사진은 마지막 후기에 등장하는 화자가 교바시 스탠드바의 마담에게서 넘겨받은 것으로써 세 번의 수기를 쓴 시절의 사진으로 소설의 시작과 끝이 같은 시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자가 사진을 넘겨받은 시점에 요조가 살아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한다. 결국 요조라는 인물은 한 사람이 아닌 이어지고 이어져 늘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닐런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늙어버린 요조의 나이는 고작 스물 일곱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젖어 있었던 감정은 애달픔과 슬픔이었다. 처절하도록 세상 속에서 '요조'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그. 나약한 부잣집 도령의 배부른 감정 놀음, 혹은 제가 제 발등 찍은 어리석은 청춘의 허영이라고 말 할 사람도 있겠지만, 태생적으로 두려움이 크고, 거절을 못할 만큼 심성이 여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얼마나 버거웠을까.




저는 올해로 마흔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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