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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Feb 05. 2021

2년 8개월 28일

살만 루슈디


진jinn, 마족의 특징은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음탕하고 움직임이 매우 빠르며 몸집과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꾼다. 시간 관념이 인간과 전혀 다르고 인간 세계와 베일 하나로 분리된 어마어마한 넓은 마계에서 살지만 참모습은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다. 마족은 인간과 다르고 부도덕한 자도 있지만 일부는 선과 악, 바른 길과 그른 길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들의 형태는 한마디로 단정지을 수 없다. 여성 마족은 진니아 또는 지나리라고 부르는데 신비롭고 모호하여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1195년,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칼리프 아부 유수프야쿠브가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작은 마을 루세나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어느날 그의 문 앞에 의문의 소녀 두니아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는데, 사실 두니아는 여마족의 지니리에 속하는 존재 지니아, 그중에서 존귀한 공주였으며 인간 세상을 모험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산 2년 8개월 28일 사이에 두니아는 세 번 임신했고 출산할 때마다 여러 명이 태아나 십 수명 이상의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귓볼이 없었으며 두니아의 성을 따라 두니아자트라고 불렸다. 그리고 다시 권력을 찾은 칼리프의 부름으로 이븐루시드는 다시 궁전으로 향한다. 결혼하지 않은 두니아와 성을 물려주지 않은 아들이를 버려둔 채. 얼마 후 두니아는 페리스탄(마계)로 홀연히 사라졌고, 그녀의 아이들은 번창했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p19




그로부터 800년 이상이 흐른 20세기, 폭풍우를 비롯한 괴이한 일들이 2년 28개월 28일 동안 이어졌다. 정원사 제로니모는 봄베이의 반드라에서 카톨릭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가 죽은 후 찰스 삼촌이 있는 뉴욕으로 보내져 건축 공부를 했으나 삼촌으로부터 물려받아 인수한 건축사무소로 원예 사업을 시작했다. 수년이 흐르고 신부인 아버지로부터 들은 은밀한 집안의 비밀은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법한 마족의 핏줄이라는 것. 귓볼이 없다는 사실이 맞긴 하지만 제로니모도 찰스처럼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 세월이 흘러 엘라와 결혼한 제로니모는 아이가 없었으나 행복했고, 다시 세월이 흘러 봄베이에서 종교 폭동으로 구백여 명이 사망한 그때 찰스 삼촌과 제리 신부(아버지)가 사망했다. 이어서 벨라의 아버지가 벼락에 맞아 죽었고, 7년이 지나고 이번에는 엘라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녀가 죽은 날은 제로니모가 라 인코에렌차에서 일한지 정확하게 2년 28개월 28일째 되는 날, 천 일 하고도 하루였다. 숫자의 저주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엘라가 번개를 맞은 날 함께 번개를 맞고도 살아남은 제로니모는 공중에서 부양하듯 대홍수 이후로 9cm 이상 떠다니며 지면 위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운전이 불가능한 것을 비롯해서 여러 이유로 일상 생활이 불편해지면서 제로니모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예순 살이 넘은 그는 이제 어떠한 자아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마왕과 흑마신이 전쟁 중 잠시 교착상태인 상황에 자연현상으로 페리스탄과 인간세계 사이를 가로막는 봉인이 깨지면서 흑마신의 우두머리 거마 주무루드가 최측근 세 명을 거느리고 인간세계로 날아들었다.


우연찮게 마신 주무르드 샤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준 가잘리는 소원을 말하라는 마신을 향해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심어달라고 말했다. 두려움만이 죄 많은 인간들을 이끌어줄 수 있기 때문에. 종교와 상관이 없는 마족이기에 이러한 소원이 의외이기는 하지만 약속은 지켜져야 하므로 주무르드 샤는 가잘리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한다. 가잘리는 언젠가 인간이 신앙을 버리고 이성 쪽으로 돌아서리라 확신했던 사상적 숙적인 철학자 이븐루시드를 떠올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주무르드 샤가 데려온 주물마 자바르다스트, 흡혈마 라임, 발광마 루비는 인간 세계를 폐허와 광기, 혼란에 빠뜨려 놓은 흑마신 4인방. 



자신의 후손인 제로니모를 처음 찾아온 두니아는 그의 얼굴에서 800년 전 사랑했던 이븐루시드의 얼굴을 본다. 그녀는 공중에서 잠들어 있는 제로니모를 보고 자바르다스트가 공중부양과 지면압박이라는 이중질병을 퍼뜨리려는 계획을 알아차렸다. 이 병은 인류를 소멸시키고 말 터였다. 제로니모 마네제스가 여마족의 후손이 아니고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거침없이 하늘로 떠올라 산소부족으로 질식하거나 저온으로 얼어죽었을 것이다. 인간세계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두니아는 제로니모를 사랑하게 되고 그에게 제로니모의 조상과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사람들이 지면에 떠다니는 분리병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모든 사람이 지면에 떠다니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한때 떠 다니던 제로니모만이 지면으로 내려왔다. 카프산의 번개공주 여마신 두니아, 일명 아스만 페리는 제로니모를 페리스탄으로 데리고 간다.


두니아와 제로니모가 페리스탄에 도착한 후 마왕이 흑마신들에게 독살당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두니아는 자신이 여마신 아스만 페리임을 각성한다. 그녀는 더이상 사랑에 연연하지 않는, 복수를 다짐하는 지배자다. 그리고 스스로 마족의 본성을 되찾은 제로니모 마제네스. 인간세계를 구하고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하는 두니아와 그의 후손이자 연인이 된 제로니모는 세상에 퍼져 있는 두니아자트들을 만날 때가 되었다.









<한밤의 아이들> <광대 샬리마르>에서 보았던 마술적 리얼리즘을 넘어서 이번에는 판타지 소설이다. 자정에 태어나 특별한 능력을 지녔던 아이들,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연인과의 영혼의 대화 등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 만났던 마술적 요소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천일야화를 모티브로 하는 소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일 하고 하루밤을 더한다. 이븐루시드가 귀양살이를 하다가 두니아를 떠날 때까지의 기간, 인간세계에 전대미문의 대홍수가 일어난 기간, 그리고 대홍수 이후 괴사가 일어났던 기간이 모두 2년 8개월 28일이었다.


소설에는 두 학자, 이븐루시드와 가잘리가 등장하는데, 이븐루시드는 이성에 우위를, 가잘리는 신(종교)을 우선하면서 대립한다. 재미있는 점은 여마족 두니아는 리븐루시드에게, 흑마족 우두머리인 주무르드는 가잘리에게 조언을 구한다. 마족은 옳고 그름의 구분이 없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다.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보니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가 없고, 취미라고는 오로지 성행위가 전부다. 이러한 마족에서 드물게(혹은 거의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외모가 아닌 지혜와 지성을 우선하는 인물이 두니아다. 그렇다보니 마계에서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같은 종족인 흑마족과 대립하는 두니아를 납득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한다.


흑마족 4인방이 인간세계에 내려와 온갖 잔혹한 파괴와 학살을 하는 모습과 두니아의 아버지를 향한 애끓는 원망은 약소국과 여성을 유린하는 기득권층 인간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발광마 루비가 미혹술을 이용해 민간금융기간의 최고지배자 대니얼 맥 아로니가 자백한 폭탄 발언은 여타 작품에서 보아왔듯 가난하고 힘없는 국가들을 경제적 우위에서 장악하려는 국가를 직접적으로 지목하고 있다. 또한 흑마족의 파괴행위가 인간의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단면이 투영되어 있음을 제로니모의 깨달음을 통해 전하고 있다. 작가는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지만 이에 대한 치유와 회복 또한 인간이 가진 힘이라고 말한다.


326.

예전의 인생과 결별하는 아픔, 그를 외면하고 그 역시 외면했던 인생행로에 대한 번뇌. 그는 이 깊은 상처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보여줌으로써 고통보다 강해졌다. 그리하여 중력을 되찾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최초 감염자가 질병의 근원으로 끝나지 않고 치유의 근원이 되었다.



살만 루슈디는 철학자 이븐루시드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며 천일 하고도 하룻밤이 늘 그렇게 지나가듯 인간은 그렇게 살고 죽으며 비록 따분할지언정, 그리고 때론 괴팍한 꿈을 꾼다 하더라도 괜찮은 삶이라고 말하며 인간끼리 잘 살 수 있음을 강조한다.


도덕적 면책특권, 분노는 동기일 뿐 변명이 될 수 없음을,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 비이성을 누르고 인종, 성별, 빈부의 차이를 허물어 조화롭게 살 수 있게 되기를, 작가와 마찬가지로 염원한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갈등이야말로 오랫동안 인류를 규정하는 서사였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 사이의 차이점, 예컨대 인종, 지역, 언어, 관습 따위는 더이상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오해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체로 만족한다.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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