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디에 May 17. 2023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브라이언 무어

아무한테도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했던 40대 여성 주디스 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주디스는 남겨지고 혼자가 되는 것에 익숙하다.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자신이 대화를 이끌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호감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도 온통 신경을 집중한다. 그렇다고해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녀는 곧이 곧대로 듣고,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들고, 혼자 결론 짓는다. 







읽는 내내 주디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외모가 뛰어나지 않다, 특출난 재능과 지참금이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등등의 이유로 주디스 헌은 폄하된다. 어처구니 없게만 보이는 혼자만의 상상과 자기혐오를 반복하는 주디스의 독백을 읽으면서 그녀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마음이 아팠다.  


주디스는 일평생 그녀의 삶을 좌지우지 했던 이모를 원망하지만, 그녀 역시 이모의 일생을 닮아간다. 다른점이라면 주디스는 제 삶의 억울함을 토해낼 대상이 조카가 아니라 술이었다는 것뿐.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아일랜드 사회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민자 신분으로 삼십 년간 미국 생활을 했으나 금의환향은 고사하고 장애를 안고 귀향한 제임스 매든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같은 성공에 대한 꿈, 미국의 화려함, 그리고 어리석은 탐욕과 쾌락을 욕망한다. 또한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로 차별을 받았던 처지에 있었음에도 아일랜드로 돌아와서는 유색 인종을 비하한다.  


라이스 부인은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을 '아기'라고 부르며 일거수일투족을 참견하고 제재하면서 모든 수발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것이 아들을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버나드 또한 그러한 엄마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하녀를 희롱하고, 거짓말까지 꾸며내 모사를 꾸미는 게 전부다.  


열여섯 살 하녀 메리는 하숙집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인 아들과 주인 동생의 희롱과 강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서도 오히려 자신을 탓한다.


이외에도 사이사이 가난한 아일랜드 경제 사정과 빈부 격차, 여성 문제, 종교 등 인물들의 정황과 사건들을 통해 19세기 이후부터 꾸준히 대두되었던 사회 문제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이 소설은 한편의 코미디극 같기도 하다.  


주디스는 오닐 부부가 절친이라고 믿지만, 정작 오닐 가족은 주디스가 일요일 오후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이 마뜩치 않고 불편하다. 그녀가 올 시간이면 네 식구가 너나할것 없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누군가 그녀를 맡아야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은 오닐네 가족에게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주디스는 오닐네 가족이 자신한테 관심도 없고, 그녀의 방문을 유쾌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교양이라는 허위 뒤에서 각자의 진심을 숨기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잘못의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상대의 치부를 까발리는 자들의 모습은 시쳇말로 웃픈 소동극처럼 보인다.  


육체적 욕망을 억누르고 기독교적 신념으로 순결을 지키며, 폭력적이고 인색한 이모를 헌식적으로 돌보았지만, 세상은 위선의 허울 뒤에서 죄악과 부패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법도, 신도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도대체 도덕과 종교와 법은 왜 존재하는가? 충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살아온 주디스는 신은 없다고 단정한다. 








주디스는 버나드와 말다툼을 하면서 이번 생은 사후에 판별될 공덕을 쌓기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말하지만, 이 고되고 외로운 십자가에 주디스 본인도 얼마나 분노했던가. 


자괴감에 치를 떨며 괴로워하는 주디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녀는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다. 고해성사를 핑계로 자신의 처지를 늘어놓는 그녀의 말을 사제조차 들어주지 않는다. 주디스는 신에게 말한다. 어서 계시를 보여달라고.  


퇴거를 통보받고 방 안에서 홀로 흐느끼며 현실과는 다른 일상과 훗날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는 주디스의 모습은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진다. 죽어서만이라도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했던 주디스의 처절한 독백이, 그리고 주디스에게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어디로 가야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대답을 못하는 주디스의 모습이, 나는 마냥 슬펐다. 


술에 취한 상태로 택시를 타고 마치 순례하듯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주디스의 모습은 재산과 마땅한 직업이 없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없는 중년의 비혼 여성을 넘어서 어느 한 곳에 안정된 삶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도시 유목민이 된 우리네 모습과 겹쳐졌다. 


결국 그녀가 도달한 곳.

주디스는 마지막까지 이모의 그늘에서도, 신에게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한 마디는 왜이리 아련한지.







1955년에 쓰여진 가난하고 외로운 비혼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이토록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주디스 헌이라는 캐릭터가 조금 극단적으로 읽힐 수 있으나 기실 우리는 점점 더 주디스 헌의 삶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에 있어 출산은 고사하고 결혼도 꺼린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수명은 연장되어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으나 실질 노동 인구는 줄어들어 노인 복지가 더 나아질지는 미지수다. 핵가족 시대에서 1인 가구 시대로 접어들어 노인 부양과 노년층 빈곤 및 고독사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또한 우울증과 극단적 선택, 조기 퇴직과 실업 등 소설에서 보여지는 사회적 문제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 크고 넓고 깊게 심각해지고 있다. 


요양원으로 보내진 에디 마리넌. 그녀의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유, 알 것 같다. 





#주디스헌의외로운열정 

#브라이언무어

#을유문화사 

작가의 이전글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