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소설은 소몰이꾼 파비아누 가족이 가뭄을 피해 무작정 길을 나선 데에서 시작한다. 목적지를 향해 계속 가야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은 그동안 살아온, 앞으로 살아갈 파비아누의 삶을 도입부부터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소설은 가뭄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이주민의 애환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층에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불공정과 불의에 익숙해져 체념적 삶을 살아가는 파비아누 가족을 통해 고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당시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파비아누는 카브라(흑인과 백인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고 남의 땅에 살며 남의 가축을 돌보며 살았다. 백인들 앞에서는 몸을 움츠렸고, 온갖 역경에서 버텨내는 힘은 스스로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짐승이라는 데에 있었다.
파비아누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줄 몰랐고, 무지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지하기 때문인지 자문한다. 만약 그렇다면 무지한 것이 죄란 말인가? 노예처럼 일하며 살아왔고 거짓없이 성실하게 살았다. 무지한 것이 파비아누의 잘못일까, 그렇지 않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생각의 실타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파비아누는,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가뭄때문에 떠난 피난길에서 파비아누 가족은 살기 위해 키우던 앵무새를 잡아먹었다. 그렇다면 노란 제복의 군인들도 살기 위해서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파비아누를 잡아 가둔 것일까. 정부가, 기득권층이 약자를 핍박하고 차별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 일까? 파비아누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파비아누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제분소 주인인 토마스 씨를 소환한다. 그는 투표권이 있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다. 피난길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파비아누는 자신의 일조차 토마스 씨에게 결정을 부탁했다. 이는 "참아요, 정부에게 얻어맞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라고 외쳤던 파비아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층의 위치를 잘 드러낸다.
소설은 상징과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극대화한다. 특히 한 가정의 가장인 파비아누와 그들이 키우는 강아지 발레이아를 같은 선상에 놓음으로써 독자는 발레이아의 삶을 관조하는데 이는 곧 파비아누의 삶임을 알 수 있다.
발길질을 당하는 일이 예사인 개 발레이아는 그럴 때마다 도망간다. 때로는 발목을 물어버리고 싶지만,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기에 분노는 금세 사그라든다. 이 모습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의 파비아누와 아주 흡사한 모습이다. 감옥 안에서든 밖에서든 군인을 향한 잔인한 복수를 상상하며 기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억울함을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해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이를 두고 파비아누의 무지를 탓할 수만은 없다.
또한 술이 들어가자 파비아누는 노란 제복 군인을 만나면 한판 붙기로 결심하고 발로 땅을 차며 소리를 질러대다가도 막상 노란 제복 군인이 나타날 것을 두려워해 가판대 너머로 몸을 숨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도발에 정작 본인 혼자 두려워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한다.
복종으로 일관했던 지난 삶을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발레이아의 모습 역시 파비아누와 아주 닮았다. 발레이아 삶의 끝을 읽으면서 파비아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비아누가 일방적으로 발레이아의 죽음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농장 주인과 파비아노의 부당한 관계, 그리고 가뭄과 광견병이 불가항력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왜 발레이아의 죽음이 아프게 다가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자신들의 권력과 약자들의 무지를 이용해 약자들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의 억압, 이자와 빚의 악순환으로 증서 없는 노예생활을 이어가야만 하는 소작농과 소몰이꾼, 가난과 천대받는 신분의 대물림, 그리고 교육의 부재를 꼬집는다.
그들의 메마른 삶이 가뭄때문만이었을까.
가뭄이 아니더라도 오직 견디고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삶 자체가 가뭄일지도 모른다. 한평생 등이 배기는 나무살 침대에서 잠을 자야하는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등을 아프게 하는 나무살을 제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들.
큰아이에게 있어서 좋은 장소는 그가 알고 있는 장소, 즉 염소 우리, 축사, 진흙탕, 안뜰, 물가, 푸른 산, 언덕 등 비록 때때로 위험이 있어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세계다. 큰아이에게 좋은 곳인 현실 세계는 언제까지 좋은 곳으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인생을 바꿔보고 싶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어 곧바로 체념하고마는 비토리아 어멈의 모습은 안타깝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고 아름다운 것들에 주목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파비아누 가족이 살인적인 가뭄에서 살아남은 건 기적이지만, 그게 전부다. 파비아노가 자신을 억울하게 감옥에 가두고 매질까지 가한 군인에게 복수는 커녕 허리를 굽힌 이유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뼛속까지 새겨진 복종의 습성이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꿈에을 꾼다. 대도시로 가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것이고 부부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21세기의 여느 부모가 그렇듯, 부부는 그 희망으로 매일을 견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기후 정의에 대한 자료를 찾던 일이 떠올랐다. 가뭄과 홍수가 극단적으로 오가는 소설 속 브라질의 모습은 현재 기후 변화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이것을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소설에서는 기후 변화가 어떻게 전지구적으로 불평등을 초래하고, 인권 및 생명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너무 잘 나타내고 있다.
비만 온다면 씨암소도 돌아오고, 농장의 목동이 될 것이다. 살이 오르고 혈색이 도는 아이들은 뛰어 놀고, 비토리아 어멈은 화려한 치마를 입을 것이며, 소들은 우리를 가득 채우고 카칭가는 완연한 초록빛으로 물들 것이다. 이것이 파비아누가,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바라는 바다.
160여쪽에 불과한 소설은 매 페이지마다 밀도감있게 채워져있다. 내용의 무게감과 글 전체에 존재하는 상징성은 웬만한 장편 소설을 능가한다. 작품도, 작가도 최초 번역이라는데 좋은 작가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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