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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Apr 24. 2024

신념 혹은 아집

네타냐후 / 조슈아 코언

원제가 재밌다. 'The Netanyahus: An Account of a Minor and Ultimately Even Negligible Episode in the History of a Very Famous Family' 



책 제목의 네타냐후가 그 '네타냐후'인가?라는 궁금증으로 도서관에 신청한 책이다. 그 네타냐후가 맞는데, 여기서 '네타냐후'는 벤냐민 네타냐후의 아버지 벤시온 네타냐후다. 실제로 저자가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회고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소설이다.





 


소설은 1959년 말, 미국의 뉴욕 변두리에 위치한 코빈 대학의 교수인 루벤 블룸이 한 이스라엘 출신 교수 채용위원으로 선정되면서 시작한다. 우리는 유대인 역사학자라고 하면 보통은 '유대인 역사'를 연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은 여기에서부터 독자의 고정관념을 지적한다. 


작가는 루벤 블룸이 처한 상황을 유머와 위트를 담아 풍자적으로 쓰면서 신시온주의에 대한 비판을 해학적으로 표현한다. 유대인의 과거를 정치화해서, 그들의 트라우마를 선동으로 바꿔놓고, 역사를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처방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 신랄하고 예리하게 짚는다. 또한 루벤 일가를 통해 유대인이 미국 이민자로서 현지화되어가는 과정이 모두 동일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원인,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들을 서술한다. 


동료 교수의 추천서를 빙자한 네타냐후 가계에 대한 설명은 현재 이스라엘 총리의 극단적인 정치 행보에 빗대어 이스라엘 건국 전후의 혼란과 국내 및 대외 정치적 상황을 간략하지만 밀도있게, 그리고 재치를 담아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더 재미있는 점은 추천서를 보낸 어느 교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벤시온 네타냐후가 이스라엘 국내에 남아있으면 젊은 학생들을 타락시킬 것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국외로 보내버려야한다고 주장한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이 탁월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의 대내외 정치적 상황과 역사뿐 아니라 미국 내 유대인 이민자 세계에서도 보여지는 계급적 차별 의식, 그리고 외부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한편에서는 여러 면(특히 종교)에서 희석되어가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유대인 전통을 따르고 있는 다양한 유대인의 현주소를 한 가정을 통해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의 고통을 잊지 못하고 전통 유대교를 따르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인 루벤의 아버지, 서유럽 출신으로서 우월 의식을 갖고 있는 이디스 부모, 이민 2세대로서 정작 자신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도 사회적으로 유대인 차별을 겪는 루벤, 그리고 더 이상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의미를 두지 않는 루벤의 딸 주디. 이들 가족 구성원 각각의 사고 방식의 차이와 갈등은 시온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네타냐후의 가족이 루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이는 태도와 말은 예의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났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을리는 만무하다. 다만 상대에 대한 의견이나 생각을 무시한 채 제 신념과 방식을 강요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앞서서 걸어가는 나타냐후를 뒤에서 바라보는 루벤의 시선, 그리고 우리들의 시선은 착잡할 따름이다.   



사족 

1. 주디가 코 성형을 위해 결정한 방법에 한참을 웃었다. 작가의 의도가 의미심장하기도 했고. 

2. 소설의 말미에 벌어지는 아수라장 속에서 이디스는 네타냐후의 아들들을 "야후들!"이라며 화를 내는데, 문득 <걸리버 여행기>의 야후들이 생각났다. 혹시 정말 그 야후들을 빗댄 것이려나...? 





206.

내가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것은 아이들의 아버지 벤-시온 때문이었다. 아니, 솔직히 모든 객원 강사와 교수를 볼 때도 나는 같은 상상을 했다. 그들은 습관적인 방랑자, 정신적인 방랑자로 이 도시 저 도시를 이방인으로 떠돌며, 과거를 씻어내고 싶다는 욕구, 잔인한 동시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장점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로 타오르는 고독한 충잡이였다. 


280.

"저 끔찍한 남자와 그의 끔찍한 아내를 만나고 나니 내가 뭔가 깨달음을 얻었어. 내가 이제는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는 깨달음. 아니, 그냥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래도 상관없어. 믿음이 전혀 없는데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뻐... 내가 신념 없이 늙어단다는 게 기뻐..."




#네타냐후

#조슈아코언 

#프시케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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