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고 녹슬지 않은 / 이혁진
소설은 과학기술 윤리에서 시작해 기업 윤리를 지나 삶과 고통의 의미,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몇 해 전에 <로봇 시대, 인간의 일>이라는 책으로 독서토론을 두 번에 걸쳐 한 적이 있었다. 한 팀은 30대 이상의 중년들이 구성 멤버였고, 다른 한 팀은 고등학생들이었다. 이 소설의 주요 제재인 자율주행자동차를 비롯한 AI 시대에 발생할만한 현상과 폐해, 그리고 윤리 의식 등에 따른 몇 가지의 주제들을 찬반으로 나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두 팀에서 보여준 시각은 사뭇 달랐다. 세대에 따라 AI 시대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달랐지만, 전체적 총평 시간에 보인 공통된 의견은 소설 속 영인이 소설 말미에 한 말과 비슷했다(그 당시 아이들의 얘기를 듣고 내가 속으로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기억한다).
소설은 근미래라고 할 것 없이 지금의 세태를 얘기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AI를 과신해 인간이 해야하는 일들을 떠맡기면서 인간은 손가락 외에는 움직일 일이 거의 없어져 간다. 운전은 자율주행자동차가 하고, 양육과 교육은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아이들은 고글을 뒤집어쓰고 AI가 제공하는 교육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양육자는 편리성을 좇으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제2의 양육자에게 자진해서 제 자리를 내어준다.
소설에서는 AI에게 결괏값을 입력하는 주체인 인간이 도리어 수치화의 대상이 되는 모순된 상황이 일어난다. 슈마허 개발 회사의 사장인 세희는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고 되받아친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을 통해 철저하게 계급 사회를 이루고, 이는 기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뿐인가. 보험사 평가액, 결혼 정보 회사의 회원 등급제, 서비스 업종에서 이루어지는 고객 등급 등 우리는 수많은 평가 기준에서 우열의 대상이 되어 숫자로 표시된다. 세희와 테드의 주장에 빗대어 봤을 때 과연 나는 얼마짜리 가격표가 매겨지려나.
돌발 사고 시 노인보다는 아이를, 빈자보다는 부자를 선택하라는 결괏값이 입력된 자동차가 낸 사고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책임에 금전적 보상만 이뤄진다면 무방하다는 금전만능주의 사고를 과연 소설일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인간이라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구원한 것이라는 세희의 어불성설이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AI 슈마허와 함께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것은 또다른 AI 아리스토텔레스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무버에서 내려오지 않고, 인간이 걷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며 걷는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말하면서 무버에서 내려오라는 부모를 향해 정신적 학대를 운운해가며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고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던지는 여덟 살 건주의 모습은 크게 어색하지 않다. 지금도 대형마트, 헤어샵, 식당에서 아주 흔하게 접하는 장면은 채 서너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어린 아이들이 태블릿 PC나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이다. 심지어 유모차에서조차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는 세희와 아들에게 해도 되는 것, 해야만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기준'을 가르치겠다는 재호의 아내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소설 속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무버 위에서 아르스토텔레스를 이용하며 부작용에 시달린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부작용은 현재 스마트폰 중독을 우려하는 양상과 비슷하다. 재호의 아들 건주와 매튜의 딸 애나는 둘 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하지만 두 아이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점은 부모와의 애착형성과 소통이다. 재호 부부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양육자의 자리를 위임했다면 매튜는 AI를 보조자 혹은 교육 도우미로 활용했다.
이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영인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조차 자율이라는 명분으로 악의적이고 잔인한 횡포와 억압을 자행해 왔다. 그런데 그 자율을 기계에까지 부여하려 든다. 영인은 사람이 사람인 이유 중 하나는 용기라고 말한다.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용기, 불의를 제거하려는 노력, 우리가 견뎌내는 고통의 의미,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억. 영인의 말처럼, 나는 나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사람인지를 생각해본다.
사족
1. 성장촉진제 주사를 맞을 아이들이 무버에 탄 채 길게 줄을 선 모습은 가히 상상만으로도 참담하다.
2. 표지에 쓰인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가 이렇게 뭉클한 말일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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