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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Dec 30. 2015

공간의 공유, 배려의 의무

예뻐서 들여온 그릇이 들려주는 이야기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아빠는 종종 나를 아빠 친구의 집에 함께 가자신다. 일 년에 며칠 쉬지 못하는 아빠는 어쩌다 짬이 나면 '가족시간+친구 시간', 일석이조 효과를 노리신다. 할아버지가 친구 만나러 함께 가자면 아빠는 따라가서겠냐는 반문으로 다섯 번에 두 번은 거절, 두 번쯤은 고민하다 거절, 한 번은 마지못해 동행한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보니 조금은 그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그나마 마지막 두 번이 생겼다.


친구분들 중 한 분은 그렇게 이삼 년에 한 번쯤은 뵈었다. 맛이 훌륭한 음식점을 하셨던 분이다. 요리도 먹고 아빠도 좋고, 이것은 내게도 먹방과 효도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기회다. 다 커서도 강아지처럼 엄마 아빠 쫓아다니는 나를  그분 내외께선 참 귀엽게 보아주셨다. 특히 아주머니께선 딸이 있어 좋겠다며 엄마를 부러워하셨다. 그 댁엔 아들만 둘 있어선지 우리 셋의 방문이 좋아 보이셨던 것이다. 엄마 역시 딸이 있어 좋다 화답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만드셨다. 그 사이에서 나는 각시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맛난 음식도 음식이지만 아주머니의 취향은 우리 모녀와 꼭 맞아 즐거웠다. 한참을 길러야 하는 다육을 가꾸시는 건 엄마의 취미와 꼭 닮았고, 그릇을 아끼시는 건 나의 취향과 잘 맞았다. 덕분에 어느 날은 어느 명장에게 맞추었다는 소스 그릇 두개를 선물로 주셨다. 가게에서 쓰는 거지만 참 색이 곱고 유약이 잘 발려 내 마음에 꼭 맞았다. 튼튼하기까지 하니 늘 찬장 맨 앞에 두고 자주 꺼내 쓴다.

된장 고추장의 한식 소스도, 케첩 머스터드 양식 소스도 잘 담아내는 이 녀석이 볼 수록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다 우린 티백을 놓을 수 있게 찻잔과 함께 내어도 어색함이 없다. 말풍선처럼 생긴 덕분에 잘 배치하면 귀엽기까지 하다. 마음에 맞는 그릇을 만나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릇을 꺼낼 때마다 취향 비슷한 우리 모녀의 대화를 부러워하던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작년 언젠가, 이제 그 가게는 두 분의 아들과 며느리가 맡아 운영한다고 들었다. 아주머니가 가게 한 층에 잘 가꾸셨던 찻집은 리모델링하여 카페가 되었단다. 시골 어딘가에서 하나씩 모은 빈티지 소품들과 누군가 정성 들여 손으로 빚은 다기, 오랜 시간 정성으로 기른 다육들은 우리 모녀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취향이 다른 누군가 보기엔 이것들이 매우 촌스럽게 여겨졌을 수 있다. 그 댁의 며느리가 그랬었나 보다. 하긴 깔끔한 카페가 보다 장사엔 도움이 될 수 있다.


카페가 되었다니 나도 조금은 아쉬웠다. 운영을 맡기긴 했지만, 아주머니도 꽤 아쉬웠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직접 가꾸어 오신 공간이었다. 며느리를 딸처럼 여기려 하셨던 분이시지만, 그래선지 섭섭함이 커 보였다. 추측 건데 기존의 공간을 싹 밀고  재정비하는 것 자체가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느끼셨던 것 같다. 적당히 수리해서 쓰면 좋을 것을 굳이 새 콘셉트로 완전히 개조하는 것은 아주머니의 공간에 대한 침범이었을 테고, 내 공간을 잃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상실감을 불러오게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사람 좋은 아주머니는 며느리에겐 큰 내색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요즘 들어 내가 그동안 '나의 공간'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가져왔는지 체감하고 있다. 이사 날짜가 꼬여버린 동생이 잠시 룸메가 되어 살면서 느끼는 것이다. 길어야 한 달 남짓 될 시간, 조금 불편하고 말 거란 예상은 틀렸다. 집에 들어섰을 때 내 취향이 아닌 물건들이 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자체가 마음을 비튼다. 이건 남의 물건의 침범 자체에 대한 반감과는 다르다. 나로 가득했던 공간에 타인의 향이 배어드는 것, 비유하자면 꽃밭 한 가운데 떨어진 운석 같달까. 지구의 물건이 아닌 이것이 나의 공간을 어색하게 만드는 데 기인한 뒤틀림이다. 내 공간은 내 세계였고, 공간이 어색해지는 것은 나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다.



공간=세계


그러니 내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매우 큰 일이다. 공간이 좁아지는 것도 조금 덜 할 뿐 큰 일이다. 공간을 나눈다는 것도 큰 일이다. 누군가와 공간을 나누고, 누군가를 위해 공간을 좁히고, 누군가를 위해 공간을 양보하는 것은 그래서 엄청난 배려를 필요로 한다. 공간에 대한 결심을 하는 순간, 그 배려는 일종의 의무가 되어 찾아온다. 에잇. 미리미리 이 룸메 녀석의 이사를 어떻게든 도울걸 그랬다. 그렇지만 이미 들였으니 나는 그 의무를 이행해야겠지. 그러니 많은 공간을 공유해야만 하는 결혼이라는 건 또 얼마나 큰 배려의 의무를 가져오겠나 싶다. 마치 언젠가는 할 것이 확실한 듯, 습관처럼 '아직' 미혼이라 스스로를 소개하는 나다. 나는 그만큼의 의무를 언젠가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마냥 좋아서 하는 게 결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 마치 그저 좋아 데려왔던 이 소스 그릇이 식탁을 차지하고 앉아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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