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l Apr 22. 2016

열 개의 장점과 한 개의 단점

전체의 가치를 알아보는 객관적인 애정이 필요한 때

할머니 집에 간다는 것은 아이에겐 큰 즐거움이다. 양육과 훈육을 병행하는 부모님과는 달리 그저 귀엽고 예쁘게만 여겨주시니 애정 충전이기도 하고, 적당한 응석으로 동네 슈퍼에 과자를 사 먹으러 가기도 하니 아이에게는 일종의 휴가다. 일본식으로 ‘오다마’라 하던 사탕이나 땅콩이 박힌 캐러멜 등 달콤한 류의 할머니 간식을 하나씩 꺼내다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할머니 손을 잡고 앞집, 옆집, 뒷집 이웃 할머니들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아이고 많이 컸네. 예쁘게도컸네.’ 애정 어린 쓰담쓰담과 함께 건네는 말씀들을 듣다 보면 어린 나는 미스코리아 진의 행진처럼 손 흔들며. 퇴장해야 하는 건 아닐까 잠시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2012년 9월, 할머니 집 가는 길


어린 때도 지금도 가장 한결같이 좋은 것은 할머니를 따라 밭에 가는 때다. 길 가의 강아지풀을 꺾어 시골 한량처럼 장난치며 설렁설렁 밭으로 향하는 길에는 풀냄새, 나무 냄새와 더불어 묵직한 거름 냄새들이 풍겨온다. 보물창고처럼 밭에는 철마다 당근, 배추, 무, 고추 등의 야채와 고구마, 감자, 깨, 콩과 같은 곡식, 감, 수박등의 과일이 서로 바통 터치하며 이어달리기 중이다. 이웃한 밭들도 모두가 그러하니, 밭에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하- 가슴이 탁 트이게 숨을 몰아 내쉬게 하고, 숨을 들이마실 때는 눈을 지그시 감게 하는 평화로움을 준다.


어느 명절에는 처음 산 카메라를 들고서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매번 느꼈던 그 평화를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셔터를 아무리 눌러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풍경을 카메라가 담아내지를 못했다. 광활하게 탁 트인 이 깊이감을 카메라는 그저 그런 평면으로, 흔하디 흔한 풍경으로 찍어냈다. 역시 카메라는 사람 눈을 따라가지 못한다.


카메라는 눈이 아니라 마음

그릇 사진을 찍기 시작한 몇 달 전, 카메라를 잘 아는 지인으로부터 단기속성 클래스를 들었다. 일종의 사사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릇이라고는 별 관심도 없는 그이지만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그릇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어느 시각에서 보았을 때 가장 예쁜지를 찾고, 얼굴을 바닥에 대고 쪼그려 찍거나, 의자에 의자를 딛고 올라가 셔터를 누르는 곡예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내가 찍는 모습과 달랐고 그 결과물인 사진도 천지차이였다. 꼭 그리 요란하게 찍어야만 하는가 농담 섞인 내 이야기에 그가 말했다. “찍는 사람이 편한 위치가 아니라, 피사체가 아름다운 지점을 찾는 게 사진 찍는 기본자세다.” 아름다운 지점을 찾기 위해서는 피사체를 잘 살펴보고 그 장점을 파악하고, 그 장점을 어떻게 드러내야 극대화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몰랐던 사실. 카메라는 눈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 이후로 서툴지만 카메라에 마음을 담는 훈련을 스스로 계속하고 있다. 찍다 보니 마음을 담는다는 말을 정말 알 것 같은 순간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나도 모르게 사진이 아웃포커싱 될 때다. 초점을 맞춘 부분만 살리고 나머지 배경은 흐리게 처리되어 드라마틱한 느낌을 주니, 이 효과를 쉽게 구현하는 렌즈들이 한동안 ‘여친렌즈’라 불리며 인기였다. ‘온 세상에서 나는 너만 보여’ 하는 그 마음이 담긴 것만 같아 찍힌 사진을 보면 나 역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릇 사진을 찍을 때도 그런 것이, 패턴이 예쁘다며 거기에만 마음이 사로잡힌 채 찍은 사진에는 패턴만 있지 컵의 손잡이가 보이질 않고, 손잡이가 예뻐 찍다 보면 컵의 형체가 알아보기 어려운 사진이 되고 만다. 단기속성 클래스에서 배운 것은 분명 장점을 살려 전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었는데, 아직까지는 그 조절이 안되다 보니 찍힌 사진의 절반은 이런 식이다. 피사체가 가진 장점을 생각하고 그를 부각하되 전체적인 밸런스를 흐리지 않을 것. 이런 점에서 사진을 찍으며 훈련하는 것은 카메라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카메라는 눈은 못 따라갈지 몰라도 마음은 그대로 투영하니 말이다.



8년째 쓰고 있는 유리컵은 와인잔 같으면서도 두툼한 것이 맥주 먹기에도 좋고, 그냥 두었을 때의 핑크빛에 찬장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애장품이다. 이 녀석을 어디서 만났는고 하니, 회사의 사내 판매에서다. 당시 해외구매대행 사업을 신설했었는데, 반품은 받았으되 돌려보내는 비용이 더 큰 몇몇 제품들을 모아 한 번에 이렇게 방류했다. 둘러보니 불빛을 잘 반사해 ‘나 좀 봐요’ 하며 핑크빛을 뽐내던 이 컵들이 있었고, 고가의 브랜드는 아니지만 튼튼하니 쓰임새가 좋을 듯 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들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반품 사유를 알 수 없어 동료에게 물으니 컵에서 보이는 기포 때문이란다. 웬만해선 눈에 띄지 않지만 한참 둘러보니 바닥에 몇 개의 기포가 보이긴 했다. 장인이 입으로 후후 불어 만든 공예품도 아닌데, 무얼 그렇게까지 꼼꼼히 보고 반품의 번거로움까지 감수했을까 싶었지만,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면 계속 불만 쌓인 눈으로 이 컵들을 볼 수밖에 없었을 테니 귀찮아도 반품한 누군가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생과일주스를 갈아 담아 마시기도 하지만, 술을 잘 못하는 1인 가구이다 보니 이 잔들은 좋은 날 보다는 나쁜 날 더 자주 꺼내게 된다. 몇 해 전 어느 여름에는, 연인으로부터 옷차림과 외모 지적을 그게 이어 태도 지적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 서러워 나라가 망한 듯 엉엉 울었다. 이야기를 듣다가 와인을 꺼내 이 잔에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멋 부리는 데 서툴러 나름의 콤플렉스였으니 그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하게 되는 나의 모습이 싫어 더 화가 났다. 가서 예쁜 애들 만나라며 엉엉 울다 결국 숨을 쉬기가 불편해져 혼났다. 내 몸에 알코올을 내가 분해하지 못해 감당 못할 술을 마시면 잘 오는 익숙한 증상이다. 대충 그러다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 어질러진 식탁을 치우는데 속 모르고 핑크빛을 반짝이는 이 유리컵 조차 원망스러웠다.


왜 나쁜 말은 칭찬보다 더 진실되게 느껴지는 걸까


그가 내게 예쁘다 곱다 했던 말들은 그저 다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었으면서 지적하는 말은 수천 년 동안 저 아래 묵혀두었다 이제 막 터져나온 용암처럼 뜨겁게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도 그저 상황을 무마하려 하는 이야기처럼 들릴 뿐, 사실 얼마나 진심이 있었겠느냐는 생각은 지금도 든다. 꼭 연애만의 문제는 아닐뿐더러, 이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문제다. 일을 하면서도 잘한 것 열 개는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고서는, 잘못한 한 개에 풀이 죽어 나의 능력은 고작 이 정도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쩌다 칭찬보다는 비판에 집중하는 동료와 함께 있을 때 이런 자신 없고, 주눅 들고 한없이 초라한 기분은 바닥에 바닥을 찧으며 내달렸다. 주어진 현실에서도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에 초점을 두며, 일찍 퇴근하니 좋다는 것 보다 느슨한 일상이 재미없다 느끼고, 막상 야근을 하면 고작 이 정도 월급 받자고 야근씩이나 하다니 하며 속상해했다. 이 따위 현실을 그냥 다 반품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기포가 있으니 쓸 수 없다며 반품한 그 누군가처럼 말이다.



이 유리컵을 볼 때마다 그날의 생각이 난다. 한참이 지나고 보니, 뭐 별 말이라고 그걸 그렇게 새겨 들었나 싶다. 어쩌다 사람들이 집에 놀러 와도 꼭 한 번씩 예쁘다 이야기하는 것이 이 녀석이다. 기포가 있어도 쓰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고, 저 작은 공기방울 하나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만족스럽다. 여전히 언제나 그 공기방울은 그곳에 있지만 그 그립감과 두께, 모양과 빛깔이 연출하는 전체의 분위기는 훌륭하다. 이 컵의 기포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번의 시련으로 삶의 전체를 부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한 번의 지적에 열 번의 달콤함을 잊지 않을 것, 한 번의 실패로 열 번의 성공을 잊지 않을 것. 그들 모두가 그저 1/11의 확률로 어쩌다 한 번 나타난 것이니, 그 한 번에 집착해 나머지를 날려 아웃포커싱 시키지 않기를,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며 마음을 훈련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간의 공유, 배려의 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