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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Dec 15. 2015

솔직함은 언제나 최악은 아니다

밋밋한 컵에 차 한잔, 북유럽그릇의 메시지

지난주 고향집에 다녀왔다. 집에 가면 늘 하는 일 중엔 앨범을 꺼내 옛 사진을 보는 것이다. 백일사진부터 최근 사진까지 나의 모든 성장기는 앨범에 담겨있다.




귀여운 어린이, 장난스러운 학생 시절을 지나면 매우 촌스러운 대학생의 사진이 시작된다. 목선과 확연히 다른 허연 화장의 얼굴, 진한 아이라이너와 말도 안 되는 초록색 섀도우, 열 살은 족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펌, 한껏 꾸민 액세서리와 하이힐, 과도한 디자인의 가방,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은 모습들이다. 이런 사진은 정말이지 불태워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나와 반대로 사진 속에는 고등학생 때부터 스타일이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한 친구가 있다. 단정한 긴 생머리와 맨얼굴, 수수한 옷차림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좀 꾸미고 살란 이야길 많이 들었던 친구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 시점에 과거 사진을 보면 그 친구가 가장 세련됐다. 늘 검정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던 잡스 형님은 참 여러 면에서 천재였다. 그래. 꾸미지 않은 한결같은 모습이 결국엔 최고의 스타일일 지도 모른다. 





몇 해 전부터 홈 인테리어 시장에 북유럽 디자인이 인기다. 북유럽식 주방, 북유럽식 인테리어 등은  세련된 감각의 상징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의 브랜드도 노르딕 라인을 줄줄이 론칭한다. 먹기 좋아하는 나는 북유럽의 그릇을 조금씩 찬장에 들여놓기 시작했던 때도 그 때다. 





그러나, 북유럽 그릇의 디자인을 보면 은근 별 것이 없다. 반짝이는 장식이 많고 여성스러운 영국이나 프랑스식 디자인과도 다르고, 원색 계열의 꽤나 화려한 지중해 연안 스페인식 디자인과도 다르다. 톤 다운된 무채색에 정교 하다기보다는 소박하고 때론 투박하다. 기교 없이 단정하다. 그래서인지 5-60년이 훌쩍 넘어서도 식탁에 올렸을 때 전혀 이질감이 없다. 긴 생머리에 맨얼굴, 십 년이 훌쩍 넘도록 같은 모습을 한 친구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맨얼굴이 그러하듯, 이들 그릇도 어느 상황에나 잘 어울린다. 그래서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 북유럽 디자인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솔직한 것은 늘 최악은 아니다."


언젠가 친구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은 일로 고민하던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하나의 발언을 통해 내가 겪을지도 모르는 비난, 파급효과, 그로 인해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주변 사람들 등에 대해 고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볼까.  그다음에 불이익이 생기진 않을까. 못난 인간으로 낙인찍히진 않을까. 그럼 나의 현재를 사랑해주는 부모님, 친구 등등에겐 큰 실망이 되겠지." 대략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꼭 큰 문제가 아니어도 이를테면 회사 미팅 중에 상대방의 의도를 잘 모르겠을 때, 상사의 이야기를 이해 못했을 때, 이해되지 않는 후배의 행동에 대해 등 궁금한데 물어보기엔 애매한 것들이 일상에 참 많다. 참 여우처럼 눈치껏 잘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처럼 눈치 없는 사람에겐 무리다. 눈치란 자고로 타고나는 것, 없던 눈치가 생기진 않으니 말이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나에겐 훌륭한 조언이었다. 최선이 무언지 잘 모르겠을 때는 최악만 피해도 훌륭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솔직함이란, 마치 기교 없이 소박한 북유럽 그릇들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사람의 맛을 더해주지 않을까. 





다시 그릇을 본다. 재료에 충실해 같은 화이트도 백색보다는 회백색에 가까운 색감이다. 일부러 눈부시게 하얗게, 혹은 금장을 두르거나 엄청난 기교의 곡선을 살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묵묵히 그들 나름의 감각으로 일관성 있게 디자인의 톤을 유지했다. 튼튼하고, 관리가 쉽고, 수납이 편하고, 매치가 편하도록 배려 있는 디자인은 시간이 흘러 가치를 인정받고 바다 건너 멀고 먼 이 동양의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솔직함이 주는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으나 그게 어려워 힘든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그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최악을 면하는 확실한 방법이진 않을까. 


세상에 나온지 50년이 훌쩍 넘도록 일상에 쓰이는 그릇을 보면 나의 쓸 데 없는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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