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면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어쩌면 삶의 지혜일지도
지난봄 이사를 했다. 한참 전에 살던 두 동네의 중간 즈음이라, 낯설긴 해도 조금 걸어 나서면 전에 알던 길과 이어지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이렇게 아는 곳이 많아질 때엔 내 땅이 아님에도 나의 영토가 넓어지는 것 같고 흑백의 도시가 조금씩 색을 입는 것 같기도 하다. 눈으로 본 지도는 쉬이 잊힐지 몰라도 직접, 특히 혼자 걸어본 거리는 머리가 아닌 두 다리에 새겨져 오래 기억하는 법. 이런 점에선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 낯선 곳을 여행하거나 사는 터를 옮겨 적응해야 할 때 유리할 수도 있겠다.
운이 좋게도 직전에는 걷고 싶은 길이 풍성한 곳에 살았다. 이미 그 동네에 살기 전부터 오랫동안 좋아해 온 길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던 것. 집을 나서서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발걸음을 아무 데로나 옮겨도 걷다 보면 예쁜 길에 도착해 있는 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사이를 그냥 걷다 보면 500살이 훌쩍 넘은 회화나무를 만나게 되는 정동길은 내가 마치 개화기의 신여성이라도 된 것처럼 주체적인 생각을 떠오르게 하고, 경복궁을 비잉 네모로 둘러 은행나무 가로수와 단정한 기와가 얹어진 담 사이를 걷는 건 머릿속이 복잡할 때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어 좋다. 대사관저와 청와대 덕분에 24시간 언제라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건 보너스. 속상한 일로 잠을 이루기 어려울 땐 새벽 두시고 세시고 자리를 박차로 일어나 나서도 걱정이 없었다. 가로등 아래 드문 드문 작은 나무처럼 서 있는 경찰 청년들을 지나 텅 빈 골목을 걸으면, 가슴이 한결 상쾌해지곤 했다. 역시 머리가 복잡한 땐 돌아가지 않는 머리 써서 고민할 게 아니라 몸을 써야 되는 거다.
온통 아파트뿐인 주거 밀집지역으로 이사 온 뒤로는 이렇다 할 산책 코스를 찾지 못해 매일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옛 철길을 따라 만든 도심의 기다란 공원이 인근에 있긴 하지만 이런 길은 꽃피는 계절이나 단풍이 예쁜 계절에 잠깐의 재미가 있을 뿐 평상시엔 그리 흥미롭지 않다. 동네 사람, 일부러 놀러 온 사람, 그저 지나는 사람이 다양하게 어우러진 그냥 길이 좋은데 맘먹고 조성된 길은 ‘자, 여길 산책하세요!’ 크게 써놓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괜한 반항심이 든다. 산책은 주변을 둘러보다 나만 알 것 같은 무언가, 그러니까 이 동네 사는 길고양이의 활동반경이나 독특한 나뭇가지, 길바닥에 박혀있는 하트 모양 돌 같은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걸 발견하는 맛인데 이토록 목적 지향적인 길만 걷는 건 싫다.
일부러 공원을 등지고 반대편으로 걸어보던 날에는 있는 줄 몰랐던 한강공원 진입로를 발견했다. 집에서 나와 사거리를 두 번 지나고 횡단보도를 세 번 건너 강변북로 아래 어둑한 길이다. 썩 쾌적한 입장은 아니어도 일단 들어서고 나면 걷는 사람에겐 딱이다 싶은 게 이 곳이다. 강 건너 여의도 한강공원은 여럿이 모여 돗자리 깔고 텐트 치고 치킨을 배달해서 맥주도 먹을 수 있는 머무름의 공간임에 비하면 강 북쪽의 공원은 이동하는 경로다.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초록이 자리하는데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한 줄로, 오는 자전거와 가는 자전거도 각각 한 줄로 다녀야 한다. 여럿이 오면 함께 걷기 불편하고,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기엔 초록의 공간이 넓지 않아 이 곳의 사람들은 대게 혼자나 둘이 와서 걷거나 뛴다. 놀러 온 사람은 없어도 머리 위 강변북로에 가득한 차들처럼 어딘가의 목적지로 가는 중인 사람들이 있는 곳, 건물로 치자면 공간들 사이의 복도 혹은 계단 같달까.
무엇보다 나는 이 공원에 강을 향해 조용히 놓인 벤치가 좋다. 한참 걷다가 해가 잘 드는 잔디 위에, 단풍이 물든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텀블러에 담아온 차 한 잔을 즐겨도 좋고 그냥 강물이 흘러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도 좋다. 아니, 꼭 앉지 않아도 괜찮다. 빨리 걷는 게 운동이 된다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바람처럼 걷다가 힐긋 바라보기만 할 때에도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좋다. 이따 돌아오는 길에 힘들면 저기서 잠깐 쉬어가야지. 바로 저기 등을 기대고 앉아 멀리 저물어가는 해가 세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걸, 빛을 머금은 강물이 반짝이는 걸 지켜봐야지. 머릿속에 저기서 쉬는 장면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진다.
가을의 하루는 서울에 온 엄마 아빠와 서촌을 걸었었다. 어쩐지 바빠서 단풍구경을 못했다기에 아쉬운 대로 통인시장을 지나 청와대 앞으로, 경복궁 옆길로 빙 둘러 나무를 보며 걷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렀다. 예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관에서 작품을 들여다보는 건 마치 고요한 우주에서 푸르게 빛나는 지구를 바라보는 것 같은 경이로움이 있어 좋아하는 일. 그런데 어느 그림 앞에선 조금 오래 있었나 싶어 둘러보면,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아빠가 없어졌다. 관람관이 여러 개라 헷갈릴 텐데 어딜 간 거지, 순간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며 찾으면 오디오나 비디오를 감상하는 코너 혹은 복도 어딘가 놓인 벤치에서 아빠가 날 보고 눈을 맞췄다. 이럴 수가. 성격은 급하고 행동은 둔한 아빠가, 길눈이 어두운 나의 아빠가 이토록 빠르고 정확하게 곳곳에 놓인 벤치를 찾아낸다는 게 놀라웠다.
벌써 세 시간 가까이 쉼 없이 걸었으니 다리가 무거울 게 뻔한데, 그걸 알면서도 섭섭했다. 기껏 데려왔더니 그림은 안 보고 앉을자리만 찾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힘들다, 쉬어 가자 했음 나을 텐데 물어보면 괜찮다고만 하는 것도 짜증이 났다. 고향집에는 없는 미술관, 내가 좋아하는 이 곳에 부모님 서울 오시면 꼭 같이 와야지 했던 건 내 욕심이지 역시 어른들 취향은 아니구나, 내 다신 같이 오는가 봐라 하는 마음이 욱 하고 솟았다.
주말이 지나 엄마 아빠가 내려가고 손님용 이불을 정리하는데, 마음이 영 불편했다. 나는 왜 아빠가 앉을 자릴 찾아다니는 게 그렇게 싫었을까. 그냥 좀 같이 쉬었다 가도 좋고 다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은데, 마음은 왜 배배 꼬이고 퉁퉁 불었던 건가. 시간이 지나 기억에 남는 건 어제 어떤 작품을 보았는지가 아니라 부모님과 미술관을 구경한 날의 잔상일 텐데 나는 왜 또 그랬을까.
마음이 복잡해져 한강을 걸었다. 내 앞에 하얀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아저씨가 방향을 틀어 ‘OO야, 여기 앉았다 가자’하더니 강가의 벤치에 앉았다. ‘아구구’ 어느 나이 때가 되면 앉고 설 때 모두가 갖게 된다는 효과음이 들렸다. 강아지처럼 솜털이 소복한 갈대가 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고개를 흔들었다.
이 곳을 걸을 때처럼, 쉼이 필요한 때를 알고 쉴 곳을 찾아 쉬면서 계속 나아가는 게 삶의 지혜일까. 젊고 어리석은 나의 열정보단 틈틈이 벤치를 찾는 아빠의 지혜가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하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번엔 더 잘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추상화라는 감상평을 수십 번 했던 것 같은 그 날과 같은 날이 또 와도, 어딘가 알 수 없는 벤치에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자꾸만 앉아 있어도, 혹은 더 자주 쉬고 더 하품을 하고 더 빨리 배부르고 더 빨리 배고파져도 우리는 또 미술관에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