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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홍철 Jun 03. 2024

크게 표 나지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존재


  ‘가구음악’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출신 음악가인 에릭 사티가 만들어 낸 말인데, 처음에는 연극의 막간에 연주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지요. 그 의미는 집 안의 가구처럼 필요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 음악을 가리킵니다. 에릭 사티 자신이 당대의 음악가들처럼 자신의 작품이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원하지 않으므로 ‘가구처럼 무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는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음악의 정신을 사람 간에 적용한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배경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늘 크게 표 나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막상 그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맥이 풀려버리는 그런 존재를 말합니다.


  올해 80대 중반인 원로 시인 정현종 교수의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유명한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가구음악에서 지향하는 것과 유사성이 있어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원로 시인은 지나온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였는데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 그때 그 사람이‘, ’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몰랐을 것을 이렇게 뒤늦게 후회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람이나 사물이 존재감이 없으면서도 막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에릭 사티는 가구음악이 “그저 공기 진동이며, 빛과 열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가구 같은 음악, 가구 같은 사물, 가구 같은 사람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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