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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마무리하며

by 염홍철



올해의 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최고 온도는 38도를 기록하였고, 열대야도 44일(제주의 경우)을 지속함으로 거의 새로운 기록을 세운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처서가 지났고, 이제 8월도 3일밖에 남지 않았으나 아직도 한낮 더위는 평상시의 한여름과 같습니다. 그래도 어제·오늘은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네요.


어느 시인이 얘기했듯이 여름은 “태양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계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 내내 굵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지냈습니다. 더위를 피해 바다나 계곡으로 떠났을 때 잠깐 즐긴 시원함은, 이내 무더위에 압도되었지요.


그런데도 저는 땀을 흘리는 계절인 여름을 좋아하고 즐기는 편입니다. 인위적인 냉기를 좋아하지 않은 탓에 집에서는 선풍기조차 거의 틀지 않고 지냈습니다. 여름 한낮 땡볕 아래에서는 누구나 행동도 느려지고 덩달아 생각도 한갓진 여유를 갖기 마련이어서, 조금 느긋하게 살아도 될 것 같은 면책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됩니다. 이런 여름의 여유를 이해인 시인은 <여름편지>라는 시에서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자고 했지”라고 다짐하였겠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여름이 오면 출렁이는 작은 바다가 되자고도 다짐합니다.


어렸을 때 살던 시골집 풍경을 상상하면 어느 계절보다도 여름이 도드라집니다. 시골집의 담과 장독대 위로 제 무게를 견디기 힘든 호박과 수세미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지천으로 피어나는 봉숭아와 샐비어, 맨드라미 등이 한낮의 햇살을 불지를 즈음 울울한 느티나무 그늘 사이로 매미 소리가 번지기 시작하면 그때가 바로 여름의 절정이었습니다.


태양의 위세가 한풀 꺾일 저녁 무렵이면 집집마다 된장 끓이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지던 고향의 정취는 언제 떠올려도 푸근합니다. 배가 고파진 까까머리 아이들은 물장구치기를 포기하고 달음박질쳐서 한걸음에 집에 당도합니다. 밥상 위에는 밭에서 갓 따온 상추와 풋고추, 호박잎과 오이냉국이 된장찌개와 함께 오르고 온 가족이 함께한 저녁 밥상이 항상 성찬이었지만, 그때는 이것이 귀하고 몸에 좋은 것을 잘 몰랐습니다.


이윽고 푸른 어둠이 시골 평상 위 모기장 사이로 모깃불 향내와 함께 스며듭니다. 맞춘 듯 평안하던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밤하늘의 별자리를 어림잡아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곤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지금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여름날의 풍경입니다.


이런 상상을 하니 올여름의 무더웠던 짜증도 사르르 녹아버리고 이해인 시인의 시처럼 “우리도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어리가 되자”는 다짐이 거부감 없이 들리네요. 이렇게 자연은 제 시기가 되면 피고 지고 흘러가나 봅니다. 그런데도 올해 여름이 너무 더워서 성급하게 여름을 마감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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