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평화와 반전(反戰) 얘기를 하면서 ‘비틀스의 전설’인 존 레넌과 설치미술가 오노 요코의 사랑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사랑을 보통 ‘솔메이트’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종교적 차원까지 확대시키는 사람들도 있지요. 우리가 누구를 열렬히 사랑할 때 “당신은 나의 종교야”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지요. 여기서의 종교는 신(神)적 차원이 아니라 절대성, 기적, 신비, 희생, 세속의 초월 등의 의미가 함축된 것이겠지요.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니까 그에게 절대성을 부여하고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하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심정을 나타낸 말이겠지요.
차원은 다르겠지만, 미국에서 20년 넘게 낮 시간대 TV 토크쇼 시청률 1위를 고수했던 오프라 윈프리는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는 저서에서 “영적인 요소 없이는 삶의 진정한 의미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얘기하는 영성은 종교와 관련이 없고,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암시하는 것은 종교 밖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전환’을 새로운 영성으로 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순간을 자각하는 것’이 영성의 본질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염홍철 <새마을 인문학> 22쪽 참조)
‘순간을 자각하는 것’은 막연하면서도 광범위한 일이지요. 그러면서도 이 말은 상당히 생동감 있는 말이 되겠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 모두로부터 생명의 본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와 정신적 교류를 하고 있었던 에크하르트 톨레도 “생각과 에고로 소외된 영혼을 떨치고 지금 이 순간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자”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순간을 자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일을 할 때, 새마을 지도자들에게 새마을 운동이야말로 ‘에고’를 파괴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바로 영적인 행동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모든 힘을 쏟는 것이 영적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창한 일뿐만 아니라 커피 한잔 마시는 행위, 또 그것을 만들기 위해 커피를 내리는 여러 과정의 행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순간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순간을 자각하는, 즉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며, 자기가 속한 조직을 사랑하면서 영적 순간을 맛본다면 이것은 새로운 깨달음이 되지 않을까요? 정답만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선택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하고, 그 순간순간을 지각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