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여섯 번의 <아침단상>을 통해 전 세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여섯 명의 억만장자, 즉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빌 게이츠를 집중 조명하고, 그들의 초국가적 권력, 민주주의 위협, 불평등의 심화 등을 강한 논조로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비판의 논리적 근거는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정부 위에 군림하는 억만장자들>의 저자 크리스틴 케르델랑의 주장을 참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틴 케르델랑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 견해도 상당히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케르델랑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케르델랑은 이들의 기술 혁신을 ‘권력 도구’로만 해석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AI, 생명공학, 우주 개발 등은 미래 사회의 발전과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이기도 한데, 이를 일관되게 위협적 시선으로만 묘사하는 건 기술 혐오 내지는 미래 공포 담론에 치우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당연히 인류 역사에서 기술은 언제나 양면성이 있었고 그들의 기여도 함께 평가되어야 공정하지 않을까요?
케르델랑은 억만장자들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고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국가나 정부의 무능이나 비효율이 이들을 키웠다는 구조적 요인을 덜 다루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많은 기술 기업들은 정부가 못하거나 늦게 한 일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냈고, 그 결과 시민들이 ‘그들을 정부보다 더 믿는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독자나 평론가는 책의 일부 서술 방식이 과도하게 극적인 언어와 음모론적 논조에 의존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신이 되려는 억만장자들”, “죽음을 정복하려는 자들” 같은 표현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오히려 논점을 흐리고 객관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일론 머스크와 빌 게이츠, 저커버그는 각자 행동 방식, 철학, 정책적 영향력이 매우 다르지만 케르델랑은 한 범주로 묶어 단일화된 ‘위협적 존재’로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개별 인물과 기업의 맥락, 공공 기여 정도, 제도 개혁 요구 수준들을 더 세밀하게 구분하는 분석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크리스틴 케르델랑의 주장은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지만, 그 비판의 강도만큼이나 객관성과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균형 잡힌 분석이 필요합니다. 저는 빌 게이츠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독서를 했지만, 케르델랑의 그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의 <아침단상>을 통해 초국가적 권력에 대한 경고와 민주주의와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점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기술 혐오나 음모론에 가까운 과잉 해석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