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입추와 말복이 지났으니까, 다음 주부터는 무더위가 꺾이고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 오는데, 우선 시집 몇 권을 구입했습니다. 먼저 문정희 시인의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라는 새 시집, 다음으로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시인이기도 한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라는 시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코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유고집에 들어 있는 <사라져 가는 시>를 서점에서 가지고 나왔지요.
오늘은 밀란 쿤데라의 유고집에 있는 <사라져 가는 시>를 통해 체코와 프라하의 문화적 특징을 살펴볼까 합니다.
이 글은 시가 아니라 산문으로 프랑스 망명 이후 조국 체코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자부심을 담은 글입니다. 특히 프라하를 중심으로 체코 문화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깊이 성찰하였는데, 그의 “소국은 당연히 대국을 모방하리라는 가정은 환상”이라는 통찰은 그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체코 문화는 단순히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대국 문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고유한 시각과 사유를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라하를 서유럽과 동유럽, 독일 문화권과 슬라브 문화권이 만나는 경계의 도시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위치 때문에 다양한 문화적 영향이 교차했지만, 그 속에서 자기만의 정체성과 미학을 지켜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그의 시에 녹아 있습니다. 그는 “프라하, 이 고통의 서구 문명의 중심지는 본래 속해 있지 않았던 동유럽의 안갯속으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라고 하여, 프라하의 정체성이 경계에 위치한 ‘이방인으로서의 독립성’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지요. 쿤데라는 또 다른 시에서 “작은 나라들이 지속적으로 정체성을 찾아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 자체가 이 지구의 획일화를 저지하며, 전통과 개성을 잃지 않게 하는 풍요를 만들어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지 문화적 주장을 넘어서 ‘인간 개성의 다양성’을 지키는 문화적 사명감을 강조한 문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유럽의 붕괴를 목도한 쿤데라로서, 그 역사적 충격을 두 가지 감정으로 묘사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알지만, 자기 민족은 일종의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당연히 가정한다. 그러나 1968년 소련의 침공 이후, 모든 체코인은 조용히 유럽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직면했다”라고 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위대함과 역사적 격변 속에서 연약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체코의 역사를 통해서 항상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끼어서 위기와 극복을 반복하면서도, 당당히 지켜내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들여다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