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가까운 후배와 만난 후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니까, 그 후배가 하는 말, “오늘 점심에 딸(결혼한)이 집에 오는데, 저한테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빨리 가서 라면을 끓여야 해요”라며 ‘이유 있는’ 거절을 하였습니다. 저는 바로 “무슨 말이야? 딸이 아버지에게 라면을 끓여 드려야지 왜 아버지가 딸에게 라면을 끓여주나?”라고, 약간 핀잔 섞인 말을 건넸습니다. 그 후배는 빙그레 웃더니, 오늘은 헤어지자고 손은 내밀었습니다. 그 후배와 헤어진 후 잠시 생각했습니다. 제 딸이 똑같은 요청을 했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저도 분명 “그래 맛있게 끓여줄 테니 빨리 와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후배와 저는 ‘딸 바보’입니다.
‘바보’라는 말은 어리석거나 미련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딸 바보’라고 하면 ‘너무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애정 어린 표현으로 쓰입니다. 즉 자기 딸을 너무 귀여워하고 자랑하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딸 바보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990년대 이후 딸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일방적인 아들 선호에서 딸 사랑으로 바뀌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예전에는 아들을 가문의 승계자로 생각했지만, 성평등 의식이 확산되면서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들은 아내보다도 딸에게 더 약합니다. 딸 앞에서는 평소에 근엄한 아빠도 어리숙해지고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는 태도가 나오지요.
그런데 ‘아들 바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당연히 딸 바보만큼 보편화되지는 않았지만, 아들을 과도하게 예뻐하는 아빠를 가리킬 때 아들 바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딸 바보와 아들 바보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지요. 딸 바보는 딸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아빠의 모습이라면, 아들 바보는 아들을 후계자처럼 자랑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영어권 사회를 잘 아는 사람에게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딸 바보라는 용어가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Daddy’s girl”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주체가 아빠가 아니라 딸 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딸의 시각에서 ‘나는 아빠의 공주다’라는 식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최근 아들 중심의 전통문화가 있는 중국에서도 우리의 딸 바보와 비슷하게 딸에게 절대복종하는 아빠가 있고, 일본에서도 딸 바보 또는 아들 바보와 같은 뉘앙스를 가진 표현들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아빠들은 딸 바보입니다.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자칭 바보들인 것입니다. 그날 딸에게 라면을 끓여주며 아부를 했을 후배를 상상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