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사상가들도 이에 대한 답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러운 정답을 찾아내지 못했지요. 그중 하나, 독일의 철학자 미하엘 하우스켈러 교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저서를 통해 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삶이라는 질문은 정답이 아닌 표현을 기다린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단일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지요. 과거에는 종교나 공동체, 직업과 같은 구조가 이 질문을 대신 답해주었지만, 오늘날 그 구조는 대부분 해체된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이제 의미는 각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의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미를 담당해야 할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우스켈러는 삶의 목적을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지요. 대신 그는 삶의 목적은 답을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고,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태도 속에 생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과 마주했는데, 그는 명예도, 부도, 작품도, 모두 갖춘 뒤에 오히려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결론은 단순합니다. 인간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사실을 외면한 삶은 어떤 성취로도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는 한 삶은 언제든 공허로 무너진다고 본 것입니다.
톨스토이에게 삶의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은 죽음 앞에서 무력했고 합리적 계산은 오히려 허무를 키웠습니다. 그가 붙든 것은 초월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삶이 이해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어떤 질서가 필요하다는 자각이었지요.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오늘을 가볍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의 사유는 노년의 삶에서 더 선명해집니다. 은퇴는 역할을 벗겨내고 상실은 삶의 서사를 흔듭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룰 것인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묻게 되는 시기입니다. 이때 톨스토이는 인간은 역할 이전의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고, 하우스켈러는 여기에 덧붙여 그 물음을 성급히 닫지 말고, 살아 있는 질문으로 견디라고 했습니다.
지난달 20일, 우리가 맞은 동지(冬至)는 밤이 가장 길지만 동시에 빛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삶도 그렇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기에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고, 의미를 묻기 때문에 오늘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거창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끝을 알면서도 여전히 묻고, 책임지고, 성실히 살아가려는 그 태도 자체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삶은 질문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겨우 유지된다는 소극적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