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

by 염홍철


요즘 며칠 문상을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문상객들이 아쉬움을 나누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인데, 한강 작가는 산 자와 죽은 자는 명확히 갈라진 두 세계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는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산 자의 몸과 언어, 기억 속에 계속 머무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강 작가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관계의 다른 형식인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흔히 생물학적 기준으로 설명하지요. 심장이 뛰느냐 멈췄느냐, 호흡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보면 그 구분은 아주 다르지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진짜 기준은 한강 작가의 말처럼 생명의 유무가 아니라,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산 자는 아직 가능성 속에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관계를 회복할 수도 있고, 선택 하나로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후회도, 변명도, 사과도 모두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산 자에게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책임을 묻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산 자의 삶은 언제나 미완입니다.


반면 죽은 자에게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더 이상 선택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수정하지도 못합니다. 죽음은 한 인간의 삶을 완결된 이야기로 고정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책임의 주체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그가 남긴 말과 행적은 더 이상 설명되지 않고, 오직 평가의 대상이 되지요. 어제 <아침단상>에서 쓴 이해찬 전 총리의 서거도 당연히 평가의 대상이었지만, 그 평가의 내용은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평가의 큰 흐름은 감지할 수 있었지요. 시간의 흐름도 다릅니다. 산 자의 시간은 앞으로 흐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있고, 쓰이지 않은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산 자의 시간에는 불안과 긴장이 따르지요. 반면 죽은 자의 시간은 멈춰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살지 않고, 기억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반복해서 호출될 뿐입니다.


이 차이는 윤리의 방향도 바꿉니다. 산 자는 여전히 상처받을 수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려와 연민은 늘 산 자를 향합니다. 죽은 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에 대한 성찰입니다. 산 자는 아직 책임을 지는 존재이고, 죽은 자는 책임에서 벗어난 대신 의미를 남기는 존재입니다. 다시 한강 작가의 작품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산다는 것은 죽은 자를 대신해 세계에 남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침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때 삶은 가벼운 특권이 아니라 무거운 사명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은 자의 몫까지 함께 견디는 일이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분명하게 가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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