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단상>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에 관해서 썼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생명의 유무가 아니라,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했지요. 죽은 자는 더 이상 선택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수정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산 자의 기억 속에서만, 제한된 방식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한강 작가가 말했듯, 산다는 것은 죽은 자와의 관계를 끌어안고 세계에 남는 일입니다. 그리고 루마니아 태생의 미국인 작가 엘리 위젤은 <나의 기억을 보라>는 책에서,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할 것인가, 어떤 삶을 의미로 남길 것인가는 모두 산 자의 몫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고, 변명하지도 못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산 자의 해석에 맡겨집니다.
그래서 기억은 위로가 아니라 책임에 가깝습니다. 죽은 자를 미화하는 기억도, 불편함을 피하려는 망각도 모두 산 자를 편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편안함은 윤리가 아닙니다. 윤리는 언제나 산 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그 의미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결국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억을 외면할 수도 있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의 자유가 바로 산 자의 특권이자 부담입니다. 죽은 자는 책임에서 벗어난 대신 의미로 남고, 산 자는 그 의미를 어떻게 짊어질 것인지에 대해 끝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삶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기억을 통해 계속 수정되고 시험받는 과정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은 자의 몫까지 함께 견디는 일입니다. 요약하면 죽은 자는 말할 수 없고, 산 자는 아직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억은 산 자의 윤리적 행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