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진정성’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꾸밈없고 솔직한 태도나 마음가짐을 말하는데, 사람들은 타인에게 특히 공인에게 진정성을 요구합니다. 반대로 그들이 행하는 것이 진정성이 아니라 위선이라고 한다면, 최악의 태도라고 비난하지요.
저는 몇 번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습니다. 일생에서 마지막 선거를 치르고 당선되어 취임하던 날, 결심을 하나 했습니다. 선거에 나오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즉 취임 첫날, 향후 불출마를 결심한 것이지요. 물론 공표는 하지 않고 가족들에게만 귀띔했지요. 왜냐하면, 정치를 하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자주 ‘비굴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을 만나거나, 마음에도 없는 상황을 접할 때도 항상 ‘비굴한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런 위선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진정성이 없으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더 옳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의 가치를 ‘동기’에서 찾았습니다. 의무에서 비롯되지 않은 행위는 참된 도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관점에서 보면 위선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이 따르지 않는 선행은 도덕적으로 완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덕을 형성한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체면 때문일 수도 있고, 남의 시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한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또 그 습관은 성품이 됩니다. 그렇다면 완전하지 않은 동기로 시작한 선행도 결국 사람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셈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라 로슈푸코는 위선을 “악덕이 덕에게 바치는 경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딘가 씁쓸하지만 동시에 의미심장합니다. 악한 사람조차 선을 흉내 낸다는 것은 적어도 그 사회가 선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완전한 진심이 아니면 선을 행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안한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하더라도 선을 행하면 누군가는 도움받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반복되는 행동은 결국 마음의 방향을 바꿀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순수한 존재라기보다 뒤섞인 존재인 듯합니다. 계산과 체면, 욕망과 이상이 함께 움직입니다.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선을 선택하려는 언행이 있다면 그것을 무조건 위선이라 단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위선은 진정성으로 이어가는 길목에 있는 미완의 단계일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