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과 충남의 통합을 찬성하면서도, 통합되면 ‘대전’이란 명칭은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현재로서는 거의 무산이 되었지만, 통합되더라도 충남·대전특별시(가칭)로 정한다고 해서 안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전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대전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은 평평한 분지입니다. 식장산, 보문산 등 200m에서 600m 사이의 산이 사계절 아름답고 비교적 높지 않아 폭우 등 자연재해가 별로 없는 살기 좋은 곳이지요. 시내를 중심으로 3대 하천이 흐르고, 3대 하천은 총연장 70.78km, 하천 폭 최대 300m로 파리의 센강 못지않은, 쾌적하고 아름다운 하천입니다. 하천 양옆으로는 자전거 도로와 산책길이 분리되어 있고 사계절 각종 꽃이 잘 어우러져 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최고의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정신적, 종교적 뿌리가 깊은 격조 있는 도시입니다. 조선시대는 학문적, 정파적으로 퇴계 선생 중심의 영남학파와 율곡 선생 중심 기호학파의 양대 산맥이 있는데, 기호학파는 경기와 충청 지역이 중심이 되어 정계 학계의 주도권을 차지했습니다. 이이(율곡), 김장생(아들 김집),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중심은 대전과 논산이었습니다. 김장생은 연산에서 활동하였고 그 제자인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대전에서 활동하였지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학문 활동을 하는 공통점이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학설상 차이가 있습니다. 영남학파는 도덕, 윤리, 명분을 주시하는 ‘주리설’이고, 기호학파는 현실, 경제, 개혁을 중시하는 ‘주기설’로 대표됩니다. 기호학파의 주기설은 오늘의 용어로 얘기하면 실용 과학이라 말할 수 있으며 현재 대전의 과학 도시 전통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전은 종교적 뿌리도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식장산과 계족산을 끼고 있는 동구와 대덕구는 유학의 본고장이고, 보문산을 중심으로 한 중구는 불교의 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도솔산과 구봉산을 안고 있는 서구는 천주교를 앞세운 서학의 발원지이며 금산 출신 윤지충과 권상연은 금산과 대전을 왕래하면서 천주교 포교를 하였고,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금병산과 도덕봉을 끼고 있는 유성구는 순교의 영향을 받은 도교 문화의 발원지로서 순교 대법 단인 천 단위 금병산에 위치하고 순교도들의 집성촌인 선인동, 만선동, 천복동 등이 이곳에 위치합니다.
대전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에 ‘대전천은 유성 동쪽 25리 지점’이라고 쓰였습니다. 1914년 조선 총독부는 대전군을 설치하였고, 1932년에 충남도청은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였습니다. 1935년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하였고,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으로 대전부에서 대전시로 개칭되었으며 그 당시 인구는 29만 명이었습니다. 1989년 대덕군이 편입되어 대전직할시로 승격하였고, 1995년 대전직할시에서 대전광역시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는 대전의 정체성은 ‘한국의 신 중심도시’라고 성격을 부여하고 싶습니다. 국가의 중추 기능(교통, 행정, 군사)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국가 개혁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영남, 호남, 수도권 등 타 지역 출신의 인구 비율이 높아 용광로(melting pot)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를 바꾸기 위한 ‘사회적 자본’ 확충을 시책으로 추진하였고, 향후 이것을 더 강화하여 전국 확산을 시도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융합 도시’입니다. 국제적 최고 수준의 교육과 과학의 인프라가 구비되었고, 국내 최고 수준의 예술 인프라와 퍼포먼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전은 아티언스(artience, art와 science의 합성어) 도시라고 불리지요. 이렇게 대전은 우리 모두의 대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