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번째 하루
아직 원고를 몇 꼭지 쓰지도 않았는데 출판사에 투고를 한다는 게 사실 무모한 일이었다. POD 자가출판 밖에 해보지 않은 무명의 저자가 완성된 원고를 싸들고 온 것도 아니고 이메일로 출판 기획서를 들이밀며 기획출판을 제안하다니.
그리하여 출판 거절 메일이 받은 메일함에 쌓여간다. 하지만 답신을 받은 나의 기분은 생각지 못한 종류의 색깔이었다. '우와, 이거 멋진데?'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판에 박혀 있지만 아주 정중하고 사려 깊은 '미안' 메일을 보냈는데 그것조차 맘에 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메일을 보낸 바로 다음날 손수 전화를 해 내 원고의 장단점과 출판 가능한 방향을 상세하게 조언해준 담당자가 있었다. 고마운데 안쪽에서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열심히 생각해낸 글의 방향이 출판에 적합하지 않으니 아예 다른 종류의 글을 쓰라니. 내 글쓰기를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하는 건지, 무얼 위해서 무얼 해야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고요히 아래로 내려가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남들에게 좋아보이는 글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데 마음이 그대로 펼쳐지는 글은 한 글자도 못 쓰겠어. 내가 사랑하는 글쓰기가 그냥 애쓰는 일밖에 안될까봐 슬퍼. 그럼 책을 만들고 싶어서 글을 쓰기 전에 널 행복하게 하는 글을 쓰자. 유명한 작가라는 이름이 생기는 내일을 위한 글 말고 오늘의 너를 위한 글을 쓰는 게 어때.
이 짧은 만남이 있은 후, 일찍 출판사 투고를 한 용감한 내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전문가들에게 내 글의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이런 멋진 기회를 스스로 찾았을 뿐더러, 이미 원고를 완결했다면 기획을 더 발전시키거나 완전히 엎는 데에 엄청난 고통이 따랐을 테니까. 책을 써서 행복해지고 싶었던 나는 출판 거절 메일의 더미 속에서 책과 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치며 '책을 써도, 책을 쓰지 않아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의 글은 내가 이런 용기를 얻게 된 데에 큰 몫을 해준 OO출판사와 오고 간 이메일의 일부이다.
from. OO출판사, to. 박유미
제가 출판사를 연 뒤 첫번째 투고 원고여서(실은 두어 군데 더 있긴 했지만 제가 검토를 제대로 할 만한 원고들은 아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검토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요.
기본적으로 저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느껴지는 글입니다. 차분한 안내가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이 글을 따라 읽게 만들고요. 대전이라는 곳을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제게 '아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해주었어요. 앞으로도 좋은 글을 기대케 하는 샘플원고였습니다.
다만 이런 장점들을 가진 콘텐츠가 모두 종이 위에 인쇄되어 책으로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선 좀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건 출판사마다 입장이 다를 테니, 편히 '저희의 입장'을 전제로 하여 적어보자면, 선생님의 글은 책보다는 온라인 콘텐츠에 더욱 적합해 보입니다. 제 생각에 책은 저자만의 개성이 다분히 들어가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저자 고유의 경험, 생각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현재 샘플원고에서는 저자가 왜 갑천을 따라 도담도담으로 가는지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갑천이라는 곳이 저자에게는 어떤 특별한 공간인지, 그곳을 매번 걸으면서 또 다른 어떤 책, 글귀, 과거 어느 여행에서의 기억 등을 떠올리는지, 그것들은 지금의 천변 걷기와 어떻게 어울리는지가 쓰여 있지 않습니다.
단순히 여정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친다면 그것은 비록 저자의 편안한 어투로 표현되고 있지만 어쩌면 안내용 리플릿의 소개 멘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만의 경험과 사유가 글 곳곳에 녹아들어야 대전을 찾는 또 다른 독자들이 선생님의 텍스트에 기대어 '내 기억과 경험이 저 공간과 어떻게 어울릴지'를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투고 원고를 읽고 회신을 드릴 때마다 항상 긴장이 됩니다.
본인 원고에 대한 조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저로서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지요. 잘해야 본전이라는 것도 (여기서 잘한다는 건 책을 내자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밝히는 일이니) 성립하는 경우가 많진 않고요. 괜히 글에 대해 품평했다가 거의 매번 혼이 나는 식이지요. 선생님께서도 어떤 점에서는 제 의견을 불편하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다만 사물과 현상에 대해 좋은 태도와 시선을 갖고 계시므로 그 힘을 온전히 잘 간직한 채 자신의 경험을 거기에 적절히 녹여보다 보면 훨씬 좋은 글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from. 박유미, to. OO출판사
안녕하세요. 박유미입니다. 길고 정성이 담긴 답변 정말 감사히 읽었습니다.
글과 책에 대한 방향을 잡아주시는 중요한 말씀들이었습니다. 제 글에 진중한 독자이자 비평가가 되어주신 대표님을 뵙게 되어 정말 기뻐요. 글을 쓰는 즐거움이 쉽고 간단하게 책이라는 물성으로 옮겨질 수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표님이 제 글에 대해 온라인 기고에 어울린다는 평을 해주신 게 그 고민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 만드는 일에 대한 애정이 답변에서 깊게 느껴져서 기쁘게 읽었습니다. 앞으로 만드시는 책에서 항상 대표님의 정성이 묻어날 것 같습니다. 시간 내어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from. OO출판사, to. 박유미
예, 선생님, 회신받고도 하루 이틀 다른 일 하느라 답장을 이제서야 드립니다.
제 말을 편히, 너그러이 받아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 혹시나 오해하실까봐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이 글이 온라인 기고에 적합하다는 것은 현재 브런치 연재만 하란 뜻은 절대 아닙니다. 대전이라는 공간이 얼핏 생각하면 산책자, 여행자에게 덜 매력적인 곳일 수 있는데 이를 거꾸로 발상 한 자체가 저자의 힘이라고 보고요.
다만 자기 서사를 가미하면 훨씬 풍요로운 글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현재 브런치의 기조는 갖고 가시되, 나중에 책으로 엮는다면 좀 더 이야기를 채워보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현재 상태로도 책을 내자고 제안하는 출판사가 있을 수 있고요.)
갈수록 말이 두서없어지지요?^^; 투고 원고에 대해 의견을 드릴 때에는 '이걸 우리가 출판하겠습니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기에, 메일 내용이 어떤 경우에는 장황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책 한 권을 내는 데에 워낙 여러가질 생각해야 하다 보니 이렇게 소심하게 응원 메시지만 드리게 되고 마네요. 아무튼 저로서는 좋은 원고와 저자를 만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