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
여느 주말처럼 해질 무렵 비슷한 반찬으로 저녁을 먹고 매번 걷던 길로 산책을 나섰다면 어땠을까. 서로 발걸음을 맞추느라 미묘한 긴장이 생겨나고 그 틈으로 피곤함이 파고드는 건 충분히 피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여행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처음 가보는 도시, 처음 걷는 길, 처음 맛보는 음식, 처음 잠드는 침대, 처음, 처음, 처음... 처음이 아닌 것이라고는 내 옆의 얼굴뿐인데, 이 익숙한 얼굴마저도 낯설게 만드는 게 바로 여행.
그는 여행지로 떠나기 전에 김 빠지게 서둘러 알아보는 걸 싫어하고, 나는 여행지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공부 하는 걸 싫어한다. 그가 고속도로의 지루함을 이겨내며 운전하는 동안 나는 사정도 모르고 쿨쿨 잠에 빠진다. 게스트하우스 옥상의 멋진 야경을 소개하고 싶은 그와 계단 몇 걸음 오르는 것도 수고스러운 나는 서로 속도가 다른 동반자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집중을 깨버려서 껄끄러운 그와 하루에 10장도 안 찍는데 야속하다 싶은 나 사이에 서운함이 비집고 들어온다. 긴 하루를 마친 늦은 저녁에 나는 따뜻한 수프가 고프다고 징징거리고 그는 시장통의 닭튀김 조각에 시선이 멈춘다.
내가 너를 이만큼 위했다고 인정받고 싶다. 그러니까 너도 나를 더 보듬어 주었으면, 내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더 잘 살펴주었으면. 익숙하지 않은 길 위에서 우리는 철없는 어린 아이 두 명이 되어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맞춘다. 때로는 내 발이 삐죽 엇나가기도 하고 너의 발이 질질 끌리기도 한다.
이런 덜그럭거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락한 자동항해장치에 우리의 몸을 싣는다면 어떨까. 가이드의 뒤통수를 따라 정해진대로 걸음을 옮긴다면, 맛집 검색 첫번째 자리를 차지한 곳으로 네비게이션을 맞추어놓고 긴 대기줄을 감수한다면, 하룻밤에 십수 만원을 더 지불하고 모든 것이 제공되는 호텔에 짐을 푼다면, 우리는 동행과의 발걸음에서 생겨나는 낯선 긴장에 둔감해질 수 있을까. 차라리 아무 곳으로도 떠나지 않는 편이 더 좋으리라.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만큼 좋은 건 없어요."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낯설지만 소중한 얼굴이 그곳에 있다. 귀찮음 때문에 준비 없이 훌쩍 떠날 때가 많은 나지만 둘이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선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뚝딱뚝딱 일정표를 만들고 예약을 해치운다. 이런 내가 푹 쉬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스피커 음량도 크게 올리지 못한 채 지루한 고속도로를 버텨내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피곤해도 꼭 껴안고 옥상의 밤 공기를 들이쉬면 행복이 몰려왔다.
그가 더 좋아하는 것, 그녀가 더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발을 내딛으며 걸음을 옮기는 여행. 우리는 사랑이라는 익숙한 단어를 탐구하러 떠나는 용감한 모험가가 된다.
그와 함께 남원 광한루에서 물빛이 어룽거리는 현판과 유려하게 늘어진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순천만 습지의 해 저무는 절경을 보겠다고 숨소리가 그르렁거리도록 언덕을 오르고 달빛 아래 아득한 갈대밭을 헤치기도 했다. 서로의 취향을 헤아리느라 곱창전골도 꼬막정식도 마음대로 사먹지 못했지만 버스 출발시간 놓칠까 함께 나눠먹은 컵라면과 과자 한 봉지가 참 달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을 열며 식빵에 잼을 발라 야무지게 먹는 맛도 참 좋다.
그와 함께라면 더 헤매도 괜찮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겨난다. 내 삶이 여행이어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