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6월 29일

by 박유미

다섯 시 반, 눈을 뜨니 새벽 푸른빛이 보이고 서서히 정신이 맑게 갰다. 속 좁게 웅크리고 있던 옹졸한 마음 대신에 타인을 내가 먼저 배려하고 껴안자는 여유로운 마음이 들어섰다. 포용의 실천이라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생각 치고는 낯설지만 기분이 좋았다. 고대하던 휴직의 첫날이다. 휴직 계획을 세우고, 영어공부를 하고, 산책을 하고,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만화방에 들르고, 카페에 갔다. 무기력하고 의욕마저 바닥에서 찰랑이던 요즘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활기찬 하루였다. 끝나지 않는 입덧 때문에 퇴근해서는 일찍 곯아떨어지기 바쁘고, 주말에도 닥쳐올 일주일을 위해 에너지를 긁어모은다는 핑계로 힘을 쭉 뺀 채 퍼져있는 게 다였으니 말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다시 보았다. 처음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는 디즈니 영화의 수법에 쉽게 당하지 않으리라는 경계심이 있었는지 무덤덤했는데, 학습을 목적으로 대사에 집중하느라 감동의 습격에 무방비했던 오늘은 한껏 울어버렸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뤄오던 정서적 기반과 모두 이별하고 성숙한 세계를 새롭게 쌓아 올린 마지막 장면이 찡했다. 부모님이 오냐오냐 키우니 유치원생처럼 구는 것만 같은 주인공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마지막 장면을 본 후에야 주인공을 평가하고 미워한 마음이 사실은 미성숙하고 부족한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어리고 못난 내가 미워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경계를 쌓고 또 무너뜨리며 점점 세계를 넓혀가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나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좀 더 너그러이 바라볼 여유를 챙기게 되었다.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을 때마다 꺼내 드는 문구가 있다. "From a certain point on, there is no more turning back. That is the point that must be reached." 당시에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겪고 나면 그 전과 같은 사람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인생의 시점들이 있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 그 순간의 신비로움이 바로 내 인생을 지탱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내 앞날의 곳곳에 숨어있을 그 날들에 대한 기대가 나를 더 살고 싶게 한다. 왠지 기분이 들떴던, 이미 다 아는 내용의 영화를 보며 울어버렸던 오늘 하루가 바로 그 신비의 순간이라면 그것도 참 멋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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