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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한국의 궁궐 ①

인문학의 프로토타입

철학자 최진식(2013)은 인문학의 개념을 쉽게 소개한다. 인문(人文)이란 ‘인간의 무늬’ 혹은 ‘인간의 결’이며 ‘인간의 동선’이다. 과거는 인간의 동선 뒤쪽이고 미래는 앞쪽 방향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바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다. 석학이 쉽게 풀어 제시한 탁견이다.      


우리나라 궁궐은 인문학의 정수요 인문의 프로토타입이다. 궁궐은 선조들이 그렸던 무늬고 흔적이다. 그것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음양의 조화, 통치 철학, 왕조 역사, 민초들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인문학의 원형(프로토타입)이라 부르는 이유다. 인문 정신과 철학이 배어있는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의 역사를 알면 한국인의 동선과 친근하게 된다.      


1392년 이성계는 개성에서 조선을 개국했지만, 왕조의 터전인 도성(都城)이 자리잡기까지 우역곡절을 겪었다.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그는 고려의 세력이 잔존해 있는 개성보다 다른 곳으로 도성을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1394년 한양 천도를 단행하고 이듬해 1395년 경복궁(景福宮)을 완공했다.  경복의 유래는 시경에 나온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景福)을 누리길 축원한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태종(이방원)이 임시 왕으로 세운 정종(이방과)은 1399년 개성으로 환도하여 과도기 내각을 관리했다. 1405년 태종(이방원)은 한양으로 환도했다.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태종이 한양으로 재 천도하면서 도성으로 굳어졌다. 한성(漢城)이 된 것이다.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태종은 멀쩡한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昌德宮)을 지었다. 이방원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1, 2차 형제의 난으로 손에 피를 묻혔다. 정권 쟁취를 가로막는 세력은 가차 없이 죽였다. 그 피비린내 나는 곳이 경복궁이다. 심리적으로 경복궁을 기피했다. 꿈에 가위가 눌렸을 것이다. 아무리 멘털이 강해도 피는 의지보다 진한 법이다. 국정은 창덕궁에서 보고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는 경복궁을 이용했다. 창덕궁이 법궁(정궁)이고 경복궁이 이궁(별궁)처럼 쓰였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 정치를 펼쳤다. 국방 분야는 자신이 재가 했다. 세종은 상왕이자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곁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어 모셨다.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라는 뜻이다. 성종은 수강궁을 중건하여 창경궁(昌慶宮)이라 이름 붙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을 맞대고 있어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한다. 이 동궐도는 국보로 지정되어 고려대와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과 뒤 이은 정유재란은 엄청난 유형의 인적 물적 피해 못지않게 무형의 피해를 입혔다. 수많은 문화재가 불에 타 소실되거나 파괴, 훼손되었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암흑기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되었다. 경복궁은 성난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 선조는 백성들에게 안심하라는 말을 해놓고 몰래 몽진(피난)을 떠났다. 6.25 때 국군이 괴뢰군을 물리치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고 피난을 떠난 이승만 정부와 데자뷔 된다. 전쟁은 인문의 동선과 흔적을 지우는 몬스터다.    


선조는 피란지에서 돌아와 월산대군(세조의 장손)의 옛 사저를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왕이 사용하는 공간이니 걸맞은 이름을 필요로 했고 이 행궁을 격상시켜 경운궁(훗날 덕수궁)으로 불렀다. 일국의 왕이 도성에 왔는데 거처할 공간이 없어 사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비참함이다. 선조는 창덕궁 복원을 서둘렀다. 


선조 때 시작된 창덕궁 복원은 뒤이은 광해군 때에 완료되었고, 법궁(法宮)이 되었다. 선조와 광해군은 전쟁 후유층으로 고통받는 백성보다는 궁궐을 짓는 데 관심이 많았다. 왕조 시대의 한계다. 왕조의 위신을 먼저 세운 다음 백성이 있다. 광해군은 경덕궁(훗날 경희궁)을 짓기 시작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인조반정으로 퇴위당했다. 인종 반정과 이듬해 벌어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 인조는 한동안 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이 복원되어 이어한 뒤에 경덕궁을 이궁으로 삼았다. 영조는 경덕궁의 이름을 경희궁(慶熙宮)으로 바꾸었다.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경복궁은 어떻게 되었는가?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복원할 때까지 270여 년 간 폐허로 남겨졌다. 이로써 한양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4개의 궁궐이 존재하게 된다. 역대 왕조들은 형제들의 혈흔이 낭자한 경복궁을 기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명당 자리를 후손들이 망쳐놓았다. 경복(景福)의 좋은 의미는 어디 가고 없다. 복에 화가 있는 법이다.     


덕수궁의 기원은? 188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던 고종은 1년 뒤 환어하면서 경복궁이 아니라 선조가 머물던 경운궁을 법궁으로 삼아 옮겼다. 이후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운궁에 석조전을 비롯한 많은 서양식 건물을 새로 지으며 근대적 궁궐로서 황궁의 면모를 갖추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은 상황으로 물러나고 뒤를 이은 순종은 1907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 황제가 머무른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에 5대 궁궐이 자리 잡게 된 약사다.      


왕조 시대 궁궐의 역사는 곧 왕조사이면서 그 나라 역사다. 궁궐의 수난사가 왕조의 수난사요 그 나라 역사의 수난사다. 선조들이 그린 역사의 무늬다. 역사는 선택 또는 취소 버튼이 아니다. 후세들이 찬란한 역사는 선택 버튼을 누르고 부끄러운 역사는 취소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싫든 좋든 우리의 역사다. 역사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김영상(1994). 서울 六百年. 대학당. 

유홍준(201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서울편 1). 창비.

최진석(2013).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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