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Nov 21. 2020

인권 쟁취 역사 ⑦

앨라배마 '셀마' 평화 행진

2020년 11월 3일 치른 미국 대통령 선거의 최종 결과가 집계되었다. 조 바이든 후보가 306명, 도날드 트럼프 후보가 236명을 확보했다. 이번 대선 결과는 2016년과 정반대로 나타나 흥미를 끈다. 당시 트럼프는 306명, 힐러리 클린턴은 236명을 확보했다. 유권자의 표심을 보면 민심의 풍향계는 신묘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선거 결과를 두고 '광범위한 선거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시간, 애리조나, 조지아, 펜실베이니아 주 등 박빙의 접전을 벌였던 해당 주법원에서는 트럼프의 주장을 기각 또는 패소 판결했다. 조지아주 연방법원의 스티븐 그림버그 판사는 "개인의 투표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며 “이것은 개개인의 유권자들이 어떻게 투표할지, 어떻게 개표할지 결정하도록 지시할 권리가 없다. 국가가 정한 절차에 법원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이 판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와 투표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색다르게 와 닿는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 수출국 미국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라 많이 어색하다. 미국은 제3국에 선거 감시단을 보내 공정 선거 여부를 판정하는 심판 역할을 해왔다. "너나 잘하세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역시 민주주의 꽃은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과 인정의 문화다. 승복과 인정이 없으면 선거 과정에서 가열된 정파, 이념, 차이가 찢어 놓은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기 어렵다.


'투표할 권리는 시민의 신성불가침한 권리'라는 조지아주 그림버그 판사의 말에 공명(共鳴)한다. 말은 현실과 공명한다. 어느 국가에서나 투표권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끈질긴 요구와 저항, 그리고 간혹 피를 흘리면서 쟁취한 인권 쟁취의 산역사다. 미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5년 3월 7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 '셀마 행진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시민들과 에드먼드 피터스 다리를 행진했다. 셀마는 미국 인권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도시이다. 1965년 3월 7일(일요일) 이곳에서 시민들은 투표권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했다. 앨라배마 주당국에서는 시위자를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진압 경찰은 말을 타고 곤봉을 휘두르면서 비무장의 시민들의 머리를 치면서 앞으로 달려갔다. 전쟁에서 말 탄 장수가 칼을 휘두르며 상대 병사를 쓰러뜨리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bloody sunday'로 부르는 이유다.


 전 세계가 남부의 백인들이 흑인들을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다루는지를 시청했다. 처음 시위 참가자는 흑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미국 전역에서 백인들도 가세했다. 당국이 비폭력 평화 시위대를 폭력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진압하면서 인종차별은 전국적인 주목을 끌었고 미국인의 인권에 대한 경각심을 촉발시켰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시위대를 이끌고 앨라배마 셀마에서 주도(州都) 몽고메리에 이르는 87km를 행진했다.


앨라배마는 'Cotton State'이다. 전성기에는 미국에서 목화 생산량의 25%를 차지했다. 앨라배마는 인근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조지아 주와 함께 딕시(Dixie)로 불린다. 앨라배마는 '딕의 심장(Heart of Dixie)'이다. 지리적으로 네 개 주들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다. 딕시는 가장 많은 노예를 소유하면서 노예해방에 끝까지 반대한 주다. 가장 악랄한 인종차별을 자행한 주 가운데 하나였던 앨라배마가 미국 민권운동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딕스의 심장이 새로운 인권 역사를 쓰기 위해 고동쳤다.


미국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은 중첩되어 있다. 독립선언문(1776년), 헌법(1789년), 노예해방 선언(1863년), 수정헌법 제13조(1865년), 민권법(1964년) 등. 그럼에도 흑인들에게 투표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남부에서 특히 흑인 투표권 행사를 교묘한 방법으로 방해했다. 대부분의 남부 주에서 흑인들이 투표하기 위해서는 읽기 쓰기 능력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투표세도 내야 했다(1966년에 연방대법원이 위헌 판결). 어느 주에서는 투표를 위한 등록 위치를 찾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주에서는 주법에 "할아버지 조항"을 명기하여 1867년까지 투표권을 얻고 있던 사람과 그 자손에 대해서는 시험이나 투표세를 면제함으로써 백인 투표율은 유지하려 했다. 1867년까지 투표권을 행사한 흑인이 있겠는가? 혹시 북부라면 모를 일이다. 남부에서 이 기준에 적합한 흑인은 아무도 없다.


앨라배마 셀마에서 시작된 참정권 요구를 위한 평화 행진은 당시 린든 존슨 행정부를 움직였다. 위정가가 민심을 정확히 읽고 정치를 하면 욕먹을 일은 없다. 역사는 존슨 대통령을 '미스터 민권'으로 부른다. 존슨은 셀마 행진 시위대를 호위하기 위해 연방군 2천 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대통령은 1965년 8월 6일 흑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투표권법에 서명했다. 골자는 '주(州)와 지방 정부가 선거 자격을 제한하거나 투표에 필요한 요건, 표준, 관행, 또는 절차의 요구를 금지했다.' 셀마는 흑인 인권 쟁취의 상징이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념 연설에서 "Our march is not finished."라고 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셀마에서 느꼈을 감회는 특별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 평등, 존엄, 행복추구, 생명을 향한 행진은 계속되어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와 국가 경영의 토대와 원칙이 된 독립선언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인권 쟁취 역사 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