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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23. 2020

인권 쟁취 역사 ⑧

미국 군대에서 흑백통합

1896년 5월 18일은 미국 인권 역사에서 악명 높은 선례를 남긴 날로 기록되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플레시(Plessy) 사건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지만 평등하게 대우한다면(separate but equal)"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미국의 백인들은 이 판결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합법적으로 흑인을 격리하고 처우하였다. 공립학교는 물론이고 식수대, 화장실, 버스, 기차의 좌석에는 백인 전용과 흑인 전용을 따로 두었다. 심지어 영혼을 구제하는 교회에서도 흑인과 백인은 커튼을 사이로 앉아 예배를 보았다.


'분리평등원칙'이라 불리는 플레시 판결은 미국 사회에서 백인이 흑인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한 대원칙이 되었다. 법률적으로는 1954년 5월 17일 브라운(Brown)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법원의 최종 판례였다. '분리평등원칙'은 군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북전쟁, 양차 세계대전에서 흑인들도 참전하였지만, 백인 부대와 분리되었다. 흑인 부대를 별도로 운영하였다. 미군은 입대 전에 적성검사를 보았다. 합격 기준은 백인은 70점, 흑인은 99점이었다. 흑인을 열등 인종으로 낙인찍은 결과다. 흑인 부대는 총을 쏘는 전투에 참전시키지 않았다. 주로 후방에서 백인들을 지원하는 병참부대에서 주로 일을 했다. 취사, 노무, 세탁, 우편 업무 등을 도맡았다. 흑인 간호병들은 흑인 병사 또는 독일군 전쟁 포로만을 간호했다.


군에서 흑인 병사에 대한 인식 전환은 2차 대전 막바지에 반전되었다. 100만 명 이상의 흑인 남성들이 징병되었고, 8만 명은 자원했다. 연합군이 승리한 요인에는 흑인들의 공로가 크다. 흑인 자원자가 많아 백인 병력의 10%로 입영자 제한을 두었다. 1950년 6.25 전쟁을 기점으로 군대에서 흑백 통합이 이루어졌다. 미군은 개전 초기 북한군을 쉽게 제압할 줄 알았다. 시간이 갈수록 계획은 틀어지고 사망자와 부상자는 늘어갔다. 미군은 흑인 입영 비율을 없앴다. 더 많은 흑인병사들이 한국 전쟁에 참전할 수 있었고 흑백 군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6·25 전쟁은 미군이 ‘흑백 통합으로 치른 첫 번째 전쟁’이었다. 전쟁 기간 연인원 총 180만 명의 미군이 참전하였는데, 그중 10만 명 이상이 흑인이었다. 흑백은 참호(foxhole)에서 함께 보초를 서고 같은 막사에서 내무생활을 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전우가 되었다. 통합 참호(integrated foxhole) 개념이 등장했다. "전투에서 병사의 피부색이 백색이든 홍색이든 흑색이든 녹색이든 아니면 청록색이든 간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1948년 7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군에서 흑인 차별을 철폐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함으로써 비로소 미군 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공식적으로 철폐됐다. 위계와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대에서도 흑백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흑백 통합을 이룬 것은 군 최고사령관 대통령의 명령이 아니었다. 다른 결정적인 요소가 있었다. 많은 백인 군인들이 죽어나가고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황이 의식의 반전을 가져왔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가 그랬고 한국전의 초반이 그랬다. 전쟁의 긴박한 전황이 군대에서 흑백통합을 이루는 촉매제였다.


흑인에게 기회의 문(A Door of Opportunity)이 열리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이 기회의 문으로 한국전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최초의 흑인 조종사 제시 브라운(1926∼1950) 해군 소위,  최초의 흑인 장성 프랭크 피터슨(Frank Peterson 1932-2015), 4성 장군 출신으로 흑인 최초 국무장관 콜린 파월(Colin L. Powell), 클라렌스 토마스 대법관(Clarence Thomas),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기득권 세력이 필요할 때 제한된 기회만을 허락하면서 그렇지 않을 때는 그 제한된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은 지독한 인종차별의 전형이다. 감탄고토(呑苦吐) 토사구팽(兎死烹)이다.


1954년 5월 17일 연방대법원이 브라운 판결에서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inherently)  위헌이다"라고 판결하면서 흑백 분리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 군대에서 흑백통합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도 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군대에서 흑백통합은 미국 사회가 흑백분리를 끝내고 흑백통합으로 가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나쁜 선례 뒤집는 데 무려 58년이 걸렸다.


Anderson, T. H. (2004). The pursuit of Fairness: A history of affirmative action. 염철현 역(2006). 차별철폐정책의 기원과 발자취. 한울아카데미.

http://m.segye.com/view/2020020250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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