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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24. 2020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

낭트칙령 vs 퐁텐블로 칙령

근세 이전 유럽의 역사는 신본주의의 종교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유럽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교 국가와의 대립은 둘째 치고라도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와의 대립은 더 격렬했고 무자비했다. 국가별로 구교와 신교를 수용하는 양태가 달랐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신교가 퍼져 나갔고 프랑스, 스페인 등은 가톨릭의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지켜나가고자 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의 간섭에서 벗어나 영국 성공회를 만들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다. 칼뱅의 종교 개혁을 신봉하는 위그노(Huguenot)*는 박해와 처벌의 대상이었다. 프랑스는 가톨릭 이외의 신앙을 가진 자를 차별하고 박해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위그노를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주는 조항을 만들어 고발을 부추겼다. 1572년 8월 24일, 가톨릭 신자들이 5천 명이 넘는 개신교 신자들을 학살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벌어진 대학살이다. 가톨릭 수장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학살 소식을 듣고 감사 기도를 올리고 기념주화까지 제작했다. 천주교가 확산되면서 신자들을 박해하고 처벌했던 조선 시대와 데자뷔 된다. 나와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1594년 2월 27일,  앙리 4세(1553-1610 재위 1589-1610)는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다. 위그노 개신교였던 그는 국왕에 오르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가톨릭 신자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 1598년 4월 13일, 국왕은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선포하여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1562-1598)의 종지부를 찍었다. 엄청난 정치적 모험이었다. 이 일로 앙리 4세는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끊임없는 암살 위협을 받았다. 결국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했다. 이 칙령은 200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를 위해 남서부 개신교 도시에서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종교 차별과 박해를 금지하고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프랑스판 톨레랑스의 비조(鼻祖)이다. 


 앙리 4세의 종교관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면 매우 특별했다. 그는 “하느님은 내 왕국의 모든 국민들이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길 원하신다.” 그는 신교든 구교든 자신의 백성들이 일요일이면 닭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풍족하게 살게 해주는 신이면 그 신이 어떤 교단의 신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아무리 위대한 종교라도 백성의 배를 곫게 하는 종교는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국왕 자신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교에서 구교로, 구교에서 신교로 개종을 반복했다. 

 

반전이 일어났다. 1685년 10월 22일,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1638-1715)가 주인공이다. 1685년 10월 18일,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공포하여 낭트 칙령을 폐지했다. 87년 만에 다시 위그노를 불법화하고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모든 개신교 학교를 폐교하고 목사들을 추방시켰다. 국왕은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치면서 절대 왕정, 절대 군주,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역사는 '절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회는 획일화된 독재가 만연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교적 관용을 포기했다. 예수회의 끈질긴 로비도 일조했다. 

 

퐁텐블로 칙령으로 프랑스는 내전 못지않은 위기에 빠졌다. 장기적으로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칙령으로 박해를 우려한 위그노 20-100만 명이 국외로 탈출했다. 위그노 숫자는 프랑스 전체 주민 2,200만 명 중 3.8%를 차지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상공업 종사자였다. 이들은 부의 정당한 축적을 인정한 칼뱅주의 교리를 따랐다. 당시 위그노는 프랑스의 기업인, 장인, 기술자의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상공업에 필수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춘 위그노가 국외로 망명하게 되면서 인재 고갈 현상이 나타났다. 


위그노는 종교, 종파에 관용적인 네덜란드, 스위스나 개신교가 다수인 영국,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등으로 이주했다. 북미 대륙과 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에도 정착했다. 프로이센이 가장 적극적으로 위그노를 수용했다. 1685년 10월 29일(퐁텐블로 칙령 1주일 후)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고 위그노 수용을 국가 정책 차원에서 접근했다. 포츠담으로 이주해 정착한 위그노인들에게는 10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는 특혜를 선사했고, 프랑스어로 설교하는 교회를 짓는 것을 지원해주었다. 경제와 상업을 잘 아는 위그노가 이주한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독일), 미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의 교훈은 정북을 가리킨다. 앙리 4세를 통해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생각해본다. 독재와 분열의 리더십은 잠시 좋을 수 있겠지만 영원히 망하고 만다. 다수 집단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가치 체계가 다른 소수 집단을 차별, 박해, 추방, 학살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를 가장한 폭력이며 독재이다. 신앙의 사유화와 도그마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이다. 1985년 10월, 프랑수아 미테랑(재임 1981-1995)은 '퐁텐블로 칙령' 선포 3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의 위그노 후손에게 공개 사과했다. 


                                                              <프랑스 위그노의 국외 이동>           


* 위그노(Huguenot)는 프랑스의 개신교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위스 사람을 뜻하는 독일어 아이트게놋세(Eidgenosse)의 프랑스어 식 사투리인 에뇨(Eignot)와 제네바의 동맹당 당수 브장송 위그(Besançon Hugues)의 성을 합친 것이다. 루터회, 칼뱅파의 개신교가 그리스도교 아니며, 개신교 지도자 개인을 추종하는 집단이라고 모욕을 주고 경멸하는 멸칭(蔑稱)이다. 거기에 더해 타국인을 가리키는 말을 붙여 자국민 취급을 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영림, 주경철, 최갑수(2015). 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 까치 글방.

주경철(2017).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근대의 빛과 그림자.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Maurois, A. (1958). Historie de la France. 신용석 역(2017). 프랑스사. 김영사.

https://namu.wiki/w/%EC%9C%84%EA%B7%B8%EB%85%B8

https://news.joins.com/article/22535605#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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