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Dec 12. 2020

부러운 사제(師弟) ②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련

최근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자 우선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기증자는 손창근(91세). 손창근의 아버지는 손세기이다. 손세기는 개성 출신으로 인삼 무역으로 성공한 실업가이다. 기증자의 이타행으로 추사의 작품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박수받아 마땅하다. 세한도가 국민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세한도' 편에서 설명했다.  


추사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공주와 혼인한 왕실의 친척이었다. 추사의 타고난 재능이 얼마나 비상했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일곱에 쓴 입춘대길(入春大吉)을 대문에 붙여놨는데 이를 보고 찾아온 박제가를 스승으로 두었다. 정조 때 재상을 지낸 체재공 역시 추사의 글씨를 보고 "이 아이는 글씨로 크게 이름을 날리겠지만, 글씨로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라고 앞날을 내다보았다. 


추사는 서예뿐 아니라 금석 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에서 뛰어났다. 그가 완성한 독창적인 추사체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신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를 고증한 고대사 연구의 선각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디 이뿐이던가. 2차 대전 중 일본에서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준 일본인 후지스카 지카시(경성제대 교수)는 추사를 청조학의 일인자로 인정했다. 그의 자손은 선친이 소장한 추사 관련 유품을 과천 추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웬만큼 존경하는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을 선뜻 내놓겠는가 싶다. 예술의 가치는 국경을 초월한다. 


소치 허련(許鍊 1809~1892)은 전라도 진도 출신의 중인 계급이었다. 소치의 조상 허대는 선조의 장자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임해군이 역모로 몰려 진도로 유배형에 처해졌을 때 진도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자칫 멸문의 화를 당할 뻔했다. 소치는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초의와 추사는 동갑으로 절친이었다. 초의는 제자 소치를 추사에게 소개했다. 초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며 예술가로 평가받는 추사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도록 추천했다. 


추사는 계급과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인품과 재능을 보고 판단했다. 대인의 면모를 갖췄다. 초의가 보낸 추천서를 읽어본 추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인재가 있으면 빨리 올려 보내지 않고 꾸물 거릴 필요 없다. 빨리 올려 보내라." 초의와 추사의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소치는 추사 집에서 머물며 그림 공부를 했다. 추사는 주관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호불호가 분명했다. 조선의 문화와 예술보다 중국의 문화와 예술을 높게 평가했다. 추사는 젊은 시절 청나라에 사신단으로 다녀왔다. 청의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된 세계관이 그의 예술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추사는 소치에게 중국 그림을 임모(臨模)하게 했다. 소치는 매일 한 편의 그림을 그리고 스승으로부터 품평을 했다. 


추사는 소치에게 그림 지도뿐 아니라 당대 이름난 문인, 예술가, 인플루언서를 소개했다. 소치가 화가로서 활동할 인적 네트워크를 제공한 셈이었다. 추사는 허련에게 소치(小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조금 어리석다.' 추사는 원나라 화가 황공망(黃公望, 1269년~1354년)의 호가 대치(大癡)인 것에 착안하여 제자의 호를 소치로 불렀다. 제자가 대치를 닮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중국의 최고 화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추사는 볌조참판의 벼슬에 있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 유배형을 받았다. 제주에서 햇수로 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소치는 제주 유배지에 세 번을 찾아갔다. 유배지에서도 스승과 제자는 그림으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곳에서도 스승은 제자를 가르쳤다. 소치는 스승의 예술 세계를 모두 빨아들일 듯 열심히 공부했다. 스승의 예술 세계를 토대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남종 문인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추사의 세한도가 유명세를 타다 보니 세한도의 주인공 되는 우선 이상적과 추사와의 인간관계가 부각되었지만, 오히려 추사와 소치의 인간관계가 더 감동적이다. 추사로부터  인적자원을 물려받은 소치는 추사의 절친이자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무르며 헌종에게 그림을 바쳐 궁중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소치와 교유한 인사들은 해남 대흥사 초의 선사, 해남의 우수사 신관호(申觀浩), 정약용(丁若鏞)의 아들 학연(學淵), 민승호(閔升鎬)· 김흥근(金興根)· 정원용(鄭元容)·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민영익(閔泳翊) 등 당대 대표적인 학자, 예술가, 정치인, 권문세가였다. 소치는 스승이 떠나고 없는 한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1856년에 진도에 귀향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 남종 문인화의 종조로 평가받는 소치가 스승을 얼마나 흠모하고 존경의 마음을 가졌는가는 추사 사후에 그의 행적이 말해 준다. 소치는 무려 20년 동안 추사 기일에 참석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된 시절이 아니었다. 진도에서 출발하면 서울에는 20일, 충남 예산에는 보름이 걸렸다. 이런 스승을 둔 소치가 부럽고, 이런 제자를 둔 추사가 부럽다. 사제의 관계가 시공을 초월하면 진한 우정이 되고 이 우정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추동력이 된다.

작가의 이전글 부러운 사제(師弟) 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