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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Dec 15. 2020

부러운 사제(師弟) ③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1713~1791)은 태어날 때부터 등에 흰 얼룩무늬가 있었다. 무늬가 표범과 비슷해서 별호를 표암(豹庵)이라 했다. 그의 부친은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였다. 영조를 축출하고 소현세자의 증손 이탄을 옹립하려 했던 이인좌의 난(영조 4년 1728년)에 형 강세윤이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썼다. 역모죄로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다.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을 제수받을 수 없었다. 표암은 과거를 포기하고 그림과 글씨로 세월을 달랬다.


마침 경기도 안산에 살던 처남이 함께 살자는 청을 해와 한양에서 안산으로 옮겨갔다. 표암은 곤궁한 살림을 면치 못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처남집에 은거하였지만, 김홍도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난의 주동자 정세윤과 강세황의 형 강세윤의 이름이 같아 누명을 썼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엄연히 성이 다른데 이름이 같다고 해서 역적으로 몰렸다. 당시에는 억울해도 그렇게 몰고 가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교를 통치 원리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사대부가 시와 글씨를 쓰는 것은 격에 맞는 행위로 보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터부시 했다. 영조는 표암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천한 기술 때문에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 영조의 말을 전해들은 표암은 소장하고 있던 그림과 붓을 불태웠다. 신분과 계급 사회에서는 그 격에 맞는 취미도 가져야 했다.


표암이 마흔 넷일 때 열 살인 김홍도(1745~1806)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안산의 김홍도 집안은 무반 출신으로 그림과는 인연이 없었다. 표암과 김홍도 집은 10리 정도 떨어졌다. 매일 김홍도는 스승 표암 집으로 가서 그림 공부를 했다. 표암은 자신의 형편도 넉넉지 않았지만 제자 홍도를 무상으로 지도했다. 종이, 붓, 먹, 벼루를 제공했다.


표암은 당시 조선 후기의 시서화 3절로 이름이 높았다. 자연히 그의 안산 집에는 유명 화가들이 찾았다. 표암은 현재 심사정, 호생관 최북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과 교유했다. 표암은 단원에게 심사정을 소개했다. 초의가 추사 김정희에게 소치 허련을 소개한 모양새와 같다. 김홍도는 스승 표암으로부터 그림의 기본기(畫訣)를 익혔다. 이제 한양의 심사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심화 과정으로 입문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를 만든 것은 천부적인 단원의 화재(畵才)와 노력, 그리고 스승 표암과 현재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단원과 표암의 인연은 그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제는 공직에서도 함께 근무했다. 표암은 60세 이상이 치른 과거에 급제하였다. 영조도 억울하게 역모로 누명을 쓴 표암을 위해 정치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단원이 30세, 스승 표암이 62세 때 한 직장에서 인연을 이어나갔다. 직장은 왕실 소유의 과일이나 채소 따위를 경작하는 사포서(司圃署)였다. 스승과 제자는 얼마나 겸연쩍었겠는가? 제자는 연로한 스승의 몫까지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이런 인연도 드물 것이다.


김홍도는 어용 화사를 세 번했다. 대단한 명예가 아닐 수 없다. 한 번 어용 화사를 해도 명성과 함께 권세가나 돈 많은 중인들로부터 그림 요청이 끊이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단원은 어용 화사라는 명예와 함께 여러 공직에 진출하였고, 이런 경험들이 화가로서 민중과 소통할 수 있는 화제(畵題)로 연결되었다. 28세 때 영조 어진을 그리고 나서 사포서 별제, 31세에 울산 목장 감목관, 36세에 정조 어진을 그리고 나서 동빙고 별제, 38세에 경상동 안동 옆 안기 역참의 찰방, 46세에 장원서 별제, 정조 어진을 그리고 나서 충청도 괴산 옆 연풍현의 현감을 제수받았다. 단원은 지방 고을의 현감부터 왕실에 꽃, 과일, 채소, 얼음을 관리, 조달하는 일, 오늘날의 우체국장과 목장의 말 관리까지의 경험을 했다. 다방면의 경험은 단원이 도화서의 전문화가에 머물지 않고 조선 최고의 민중화가로 입지를 굳히게 했다.


스승 표암 강세황이 단원 김홍도에 대쓴 단원기(檀園記)는 스승과 제자의 아름답고 멋진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스승은 제자에 대한 기록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을 남겼다. 그만큼 제자를 아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연령과 신분을 뛰어넘은 부러운 사제였다. 망년지우(忘年之友)였다. 단원기에서 스승은 제자와의 관계를 회고하고 제자의 그림과 인품을 평가했다. 아래의 인용문은 김홍도가 자신의 호를 단원(檀園)으로 정하고 싶다는 뜻에서 스승에게 기문을 부탁한 것으로 스승은 두 번에 걸쳐 기문(記文)지어 자신의 유고집에 남겼다.


"예나 지금이나 화가는 각자 하나만 능숙하지 두루 솜씨가 있지는 못하다. 그런데 김홍도 군은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전공하여 못하는 것이 없다. 인물(人物)ㆍ산수(山水)ㆍ선불(仙佛)ㆍ화과(花果)ㆍ금충(禽蟲)ㆍ어해(魚蟹)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옛사람과 견주더라도 맞설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신선도나 화조도에 더욱 솜씨가 있어 이미 한 세대에 유명하고 후대까지 전할 만하다. 우리나라 인물이나 풍속을 그리는 데는 더욱 능하였다. 예를 들어 선비가 공부하는 모습ㆍ상인이 시장에 나서는 모습이나 나그네ㆍ규방 여인ㆍ농부ㆍ누에 치는 여자ㆍ장군ㆍ이층집ㆍ황량한 산ㆍ들판의 물에 이르기까지 모습을 곡진하게 그려서 그 모양이 실물과 차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중략) 영조 조에 어진을 그릴 때 김홍도는 일을 맡으라는 부름을 받았다. 또 지금 임금 정조(正祖) 때에도 명을 받들어 임금의 화상을 그려, 이를 크게 칭찬하는 뜻으로 특별히 찰방 벼슬에 임명되었다. 돌아와서는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마당을 깨끗이 하여, 좋은 화초들을 섞어 심었다. 집 안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먼지도 일지 않았다. 책상과 안석 사이에는 오직 오래된 벼루와 고운 붓, 쓸 만한 묵과 희디 흰 비단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단원이라 호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주길 원했다. (중략) 나는 노쇠한 나이에 군과 더불어 사포서(司圃署)의 동료가 된 적이 있다. 일이 있을 때마다 군은 번번이 나의 노쇠함을 걱정하며 내 대신 수고를 해 주었으니, 이것이 내가 더욱 잊지 못하는 바이다. 요즘에는 군이 그림을 그리면 으레 나를 찾아와서 한두 마디 평을 써 달라 했으므로, 궁궐에 있는 병풍이나 두루마리까지에도 더러 내 글씨로 쓴 것이 있다. 군과 나는 ‘나이를 잊고 지위를 잊은’ 채 교제한 사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단원에 대한 기문을 사양할 수 없고, 단원의 호에 대해서 말을 붙일 겨를도 없어서 대략 군의 평소 모습을 써주어 응하노라. 옛날 사람들은 소식(蘇軾)의 「취백당기(醉白堂記)」를 가지고 한기(韓琦)와 백낙천(白樂天)의 우열을 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제 이 기문에서, 이장형과 김홍도의 우열을 논했다 하여 사람들이 혹 나를 꾸짖지 않겠는가." - [檀園記]


"영조 말년에 어진(御眞)을 그리라고 당대 초상화에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았는데 군이 진실로 적격이었다. 일을 마치자 사포서 관직에 임명되었는데, 때마침 나도 관직에 있어 군과 동료가 되었다. 예전에는 아이로만 보았는데 이제는 같은 반열에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낮춰 불러 한스럽게 하지 않았고 군도 자기를 낮추고 공손하여 으레 함께 일하는 것을 영광스레 여기었다. 나도 군이 자만하지 않는 것에 감복하기도 하였다."-[檀園記 又一本]


이충렬(2019). 천년의 화가, 김홍도. 메디치.
강세황. 표암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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