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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Dec 16. 2020

부러운 사제(師弟) ④

다산 정약용과 치원 황상

다산(茶山)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파를 대표하는 지식인, 관료, 저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다독과 다작의 상징이다. 당시 정치 지형은 노론이 정권을 잡고 당파, 세도 정치를 했다. 정조의 신임을 받은 정약용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다. 그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당파와 당색에 따라 가문의 성쇠도 개인의 미래도 결정되는 시기였다. 조선판 카스트 제도가 정치, 경제, 사회에 만연했다. 카스트에서 신분과 계급에 맞춰 직업, 결혼, 취미 등이 결정되는 것처럼 조선에서도 당파와 당색이 같은 집안끼리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가질 수가 있었다. 조선 후기는 당파정치, 붕당정치가 극에 달했다.


정약용의 가계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보급, 전파와 관련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정약용은  이승훈(처남 매부), 황사영(조카사위), 정약종(형)과 혈족 관계였다. 서학에 대한 관심이 컸던 정약용도 한 때는 천주교 교리에 천착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집권세력 노론에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의 과거 천주 교리에 대한 관심과 천주교인들과의 교류, 그리고 집안의 천주교 내력 등으로 유배형을 당하였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 18년이란 숫자가 말해주는 것처럼 정조 이후 다산을 유배지에서 해배(解配)시킬 줄 정치적 뒷배가 없었다. 줄 떨어진 연이었다. 다산은 강진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강진과 해남은 다산의 외가와 친인척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가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행이었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 다행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다산의 부친 정재원의 부인 윤 씨는 고산(孤山) 윤선도의 5대 손녀였다. 다산은 공재(恭齋) 윤두서의 증손자였다. 해남 윤 씨의 시조 격인 고산 윤선도는 일찍이 해남에 자리 잡은 명문세가로 남인의 영수를 지냈다. 다산은 외가의 후광을 톡톡히 누렸다.


강진에 둥지를 튼 다산은 저술 작업과 함께 지역의 학동들을 제자로 맞아들였다. 이 제자들은 두 부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다산이 처음 강진에 도착하여 은거하였던 주막집의 사의재(思宜齋)에서 가르쳤던 제자이고, 다른 하나는 해남 윤 씨 가문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이었다. 다산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공자의 유교무류(有敎無類)를 실천했다. "가르치는 데는 계급이 없다." "하늘이 사람을 내릴 때는 귀천을 두지 않았고, 멀고 가깝고의 구분도 두지 않았다."


15세의 황상(黃裳 1788~1863)은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첫 번째 제자였다. 황상의 아버지는 관청의 아전이었다. 강진 주막집 골방 사의재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다. 양반이 아니면 과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다산은 황상에게 시를 가르쳤다. 다산의 눈에 황상은 시재(詩才)가 있었다. 다산은 황상을 무던히 아꼈다. 환경만 갖춰주면 쑥쑥  커나갈 재목이었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읍내에 있을 때 아전 집안의 아이들로서 4, 5명이 배우러 왔는데 모두가 몇 년 만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아이 하나가 단정한 용모에 마음도 깨끗하고 필재는 상급에 속하며 글 역시 중급 정도의 재질을 가졌는데,... "


다산은 제자를 엄하게 지도했다. 황상이 부친을 잃고 낙담하여 방황하던 때였다. 다산은 황상이 집에서 놀고먹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선 ‘날마다 방에서 잠만 자고 하루에 두 끼를 먹으니 편안하더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쩌면 그렇게 윤리와 의리를 저버릴 수가 있느냐. 네 나이가 마땅히 집안일을 주제해야 할 스무 살이 아니더냐.’ 극단적인 표현도 등장했다. ‘나는 너 같은 인간을 다시 보고 싶지 않구나’ ‘나는 너에게 과거의 사람이다’ ‘인연을 그만 끊자’ 황상이 신혼 재미에 빠져있을 때는 ‘당장 짐을 싸라. 절에 가서 공부하고 매일 시 한 수를 지어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다산의 엄한 지도를 받은 황상의 시는 스승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 지식인 그룹에는 추사 김정희도 포함되었다. 다산은 제자의 원석을 찾아내어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들었다. 황상은 치자꽃을 좋아하여 호를 치원(巵園)으로 지었다. 그는 시를 지어 이름을 알린 것뿐 아니라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닮고자 했다. 그의 스승에 대한 진정성은 다산의 아들들을 감동시키고 후대에까지 교류가 이어졌다.


황상은 1836년 다산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재로 다산을 찾았고 1845년 다산의 기일에 다시 방문하여 다산 형제와 정황계(丁黃契)를 맺었다. 정황계는 황상과 다산의 아들 정학연, 정학유 세 가문 자손들이 교류하겠다는 약속이다.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은 멋진 약속이 아닐 수 없다. 황상은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와 초의 선사와도 교류하였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 끝나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황상이 살던 강진 백적산 아래의 일속산방(一粟山房)이었다. 이 당호는 다산의 맏아들 정약연이 지어주었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추사가 해배 후에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다산의 제자 황상이었다. 황상이 집을 비운 뒤라 추사와 황상의 조우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후 황상이 추사의 집을 방문하면서 교류가 이어졌다. 이런 경우를 유유상종이라고 하였던가. 다음은 황상의 시에 대한 추사의 평이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작품이 없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두보(杜甫)와도 같고 한유(韓愈)와도 같으며 소식(蘇軾), 육유(陸游)와도 같다는 것을 장황히 늘어놓아 찬양하였으니 황상의 시에는 더욱 더할 수 없이 했다. 나는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황상과 다산은 부러운 사제 관계를 넘어 그 철학을 후대까지 계승시켜나가는 특별한 유산을 남겼다. 인간의 재능을 꺼내는 것 못지않게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박석무(2019 )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석한남(2017)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시루

이덕일(2017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다산북스.

정민(2011). 삶을 바꾼 만남. 문학동네.

치원 유고(巵園遺稿)

구사회, 김규선(2012). 치원소고(巵園小藁)』와 황상(黃裳)의 만년 교유. 동악어문학 58권.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8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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