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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Dec 29. 2020

인권 쟁취 역사 ⑪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인종 차별과 인종 분리에 관한 한 미국의 짐 크로우(Jim Crow) 못지않게 악명 높은 법이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이다. 아프리카어로 '분리(separation)'를 뜻한다. 1948년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법률로 공식화했다. 백인이 합법적으로 유색 인종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정책이다. 악랄한 아파르트헤이트 사례 중 하나는 ‘반투스탄(Bantustan)'이라는 부르는 '흑인 격리 시설'을 들 수 있다. 불모지에 가까운 분리 지역에 흑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각종 권리와 혜택을 박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사람을 백인, 흑인, 컬러드, 인도인 등 인종 등급으로 구분했다. 인종별로 거주지 분리, 통혼 금지, 출입 구역 분리 등의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남아공 버전의 카스트 제도이다. 백인 정권은 인종 '차별'이 아니라 '분리'한 것이라고 우겼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흑과 백을 분리했을 뿐이었다고... 국제사회는 악랄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월드컵과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대회 남아공의 참여를 금지했다. 유엔에서는 회원국 지위를 강제로 박탈했다. 국제적 제재로 경제적 손해와 불명예를 주어 정책 폐지를 촉구했다.


마하트마 간디도 남아공에서 변호사로 활동할 때 인종차별로 많은 수모와 모욕을 겪었다. 간디는 1년 계약으로 남아공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했다. 인도인들은 1860년대 인도와 남아공을 지배한 영국인들의 계약직 노동자로 남아공에 들어왔다. 간디는 남아공에서 동족들이 백인들로부터 차별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키우고 비폭력 저항 방식을 신념으로 굳혔다. 간디 자신도 1등석 기차에 탔다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쫓겨나기도 했다. 이곳에서 비폭력 인종차별 투쟁인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를 실천에 옮겨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간디의 핵심 사상인 비폭력 저항의 뿌리는 남아공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1990년대 폐지된다. 남아공 내 흑인들의 무장 투쟁과 국제사회의 제재에 백기를 들었다. 백인정부는 1990년 2월 흑인들의 희망이었던 넬슨 만델라(Nelson R. Mandela, 1918-2013)를 석방시키고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를 위한 전향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1994년 만델라는 민주적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이었다. 미국에서도 버락 오바마가 첫 흑인 대통령(2009-2017)에 당선되었다. 만델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94년 4월 완전 폐지되었다.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를 위한 행동을 보였을 때 국제사회도 응답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월드컵 축구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유엔에도 재가입되어 복권되었다. 1993년 데 클레라크 대통령과 함께 만델라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면서 남아공의 인종차별 종식을 지지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에 관한 한 국제사회의 공조와 협력은 빛을 발했다.  


넬슨 만델라는 1962년 반역죄로 체포되어, 196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7년 만인 1990년 2월 출소했다. 그는 백인이 흑인에게 저지른 박해와 탄압의 상징이었다. 그랬던 그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1994-1999)으로 취임하여 '진실과 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결성하였다. TRC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백인 정권의 탄압과 박해를 받았던 만델라가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더 있었다. 많은 노벨평화상 수상자 중 만델라만큼 적격자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위원회에는 남아공 민권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성공회 데스몬드 투투(1931~) 주교가 위원장으로 참여하였고, 수많은 과거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조사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아래에서 흑인들을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였으며,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히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투투 주교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종식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투투 주교는 과거사 청산은 철저한 진상 조사와 용서가 실천될 때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을 담은 책이 '용서 없이 미래 없다(No Future without Forgiveness)'이다.


넬슨 만델라와 투투 주교의 화해와 용서 모델은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1998~2003)의 통치 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DJ는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었다. DJ와 만델라의 삶의 궤적에는 유사한 면이 많다. DJ를 아시아의 만델라로 부르는 이유이다. 두 사람 모두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이후 그를 박해하고 탄압했던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해 그들의 가족과 측근에게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인적 청산을 중시하는 '정의 모델' 대신 화해와 용서를 강조하는 '진실화해 모델'로 과거사 청산 작업을 했다.   


우리나라도는 만델라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영감을 얻어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출범시켰다. 이 위원회는 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해외동포사, 광복 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은폐된 진실을 밝혀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위대한 실천가는 위대한 사상의 씨앗을 심는다. 씨앗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며 열매를 맺는다. 인권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헨리 소로우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으로 뿌린 씨앗은 톨스토이의 평화사상 나무로 성장하고,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민권운동, 만델라의 진실과 화해 모델, 김대중의 화해와 용서 모델로 열매를 맺었다.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는 과정을 보면서 교훈을 얻는다. 세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신장을 위해 함께 힘을 합친다면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다. 국가 간에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인간의 기본권 보호와 신장을 위해서는 모두가 팔을 걷어부치고 힘을 모아야 한다. 인권은 전 지구적 대의명분이다. 카투사로 근무할 때 흑인의 손 등에서 나는 피 색깔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붉은 피였다. 은연중에 나의 마음속에는 흑인의 피는 검은색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나의 다문화 감수성은 커지고 넓어졌다. 모든 인간의 피는 똑같이 붉다. 단지 피부색이 다를 뿐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42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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