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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Dec 26. 2020

인권 쟁취 역사 ⑩

라스 카사스(Las Casas) 신부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는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라는 긴 이름의 지명이 있다. 스페인 사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Las Casas)를 기리기 위한 지명이다. 멕시코는 약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 통치(1521~1821)를 받았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우리나라 지명에 일본의 저명인사를 기리는 지명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식민 지배를 받은 민족이라면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멕시코인들도 그들에게 특별한 인물이 아니라면 그를 기념하는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1492년 스페인 페르난드와 이사벨라 공동 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을 식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즈텍 문명을 꽃피웠던 멕시코도 1519년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무너졌다. 코르테스가 이끄는 정복자들은 불과 2년 만에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불과 수백 명의 군사로 수만의 원주민 군사를 물리쳤다.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유럽인들이 가져온 바이러스였다. 바이러스 면역 부재였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정복지는 누에바 에스파냐(새로운 스페인)로 불렀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수탈했다.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조차 여기지 않았다. 대다수의 노예 신학자들은 원주민들은 선천적으로 노예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스페인의 강압적 방식을 옹호했다. 도미니카 수도회의 라스 카사스 신부(1474~1566)는 정복자들과 일부 사제들의 원주민 수탈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해방신학자였다. 그는 원주민 노동력 착취자들과 정복자들을 비난하면서, 이들에게 고백성사의 기회조차 거부했다. 그의 견해는 여덟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복이라 불리는 모든 전쟁은 정의롭지 못하다.

둘째, 우리는 부당하게 인디오들의 왕국과 정부를 빼앗았다.

셋째, 엔코미엔다(Encomienda)*와 레파르티미엔토**는 잔인하고 그 자체로 악이다.

넷째, 이런 제도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큰 죄를 저지른 것이고,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다섯째, 터키인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전쟁과 약탈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군주는 아메리카 인디오에 대한 전쟁과 도적질을 정당화할 수 없다.

여섯째, 스페인으로 온 금, 은, 진주를 비롯한 모든 재물은 훔친 것이다.

일곱째, 이를 보상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여덟째,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우리에 대해 정의로운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를 그들의 땅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


한 때 군인으로 참전하고 군종으로 식민지 개척에 부역하고 그 공로를 인장받아 원주민을 할당받아 노예로 부렸던 사제 라스 카사스의 고해성사였다. 그는 인디오에 대한 약탈, 학살, 착취 행위의 잔인성, 불법성, 부당성을 인정하면서 성직자 답게 구원과 연결지었다. 고해성사에 그치지 않고 페르디난드 국왕을 비롯한 식민지 주요 관계자를 만나 부단히 설득을 시도했다. 그를 인디오의 수호자로 부르는 이유이다. 그는 "자연법과 규칙, 인권은 모든 민족에 공통된 것이다. 기독교인이든 이방인이든, 종파·법·국가·피부색에 관계없이 차별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 그들도 인간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할 권리가 없으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인권 사상은 혁명적이었다.


급기야 1550년 스페인 수도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세기의 논쟁이 벌어졌다. 원주민 입장을 대변하는 라스 카사스와 그에 반대하는 철학자 세풀베다(1490~1573)가 맞붙었다. 쟁점은 신대륙 원주민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성에 대한 평가였다. 라스카사스는 “원주민들이 참된 신앙의 계몽을 받지 못한 탓이기 때문에 설득과 교육으로 교화시키면 된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세풀베다는 “사람을 제물로 바칠 만큼 피를 좋아하는 저주받은 종족을 강압적 방법으로 지배하고 통치해도 문제가 없다”라고 맞섰다. 세기적 대결은 라스 카사스의 승리로 끝났다.


라스 카사스는 현대 인권사상의 효시로 평가받지만, 비난받을 주장도 했다. 그는 인디오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데 성급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건강한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라고 주장하였다. 수천 만의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는데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오해를 살 만했다. 라스 카사스가 일생 원주민 인권개선을 헌신했지만 욕을 먹는 이유이다. 당시 인권사상의 한계였다. 범인류적 관점에서 인권 사상을 적용하는 아니라 아메리카 인디오에 한정하는 우를 범했다.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해외 식민지를 개척할 당시 종교도 일정 부분 그 명분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전제 국가와 절대 왕정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성직자들을 이용했다. 사제 라스 카사스의 사상은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였다. 그를 선각자로 부르고 멕시코인들이 그의 이름을 따 지명을 붙인 이유이다


* 국왕이 식민지 정복자들에게 원주민을 위탁하는 제도다. 즉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위탁받아 보호하고 종교적으로 교육시켜 그들을 '문명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어린 양'으로 만드는 의무를 가지는 대신에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제도였다.  

** 토지와 원주민을 식민 경영자에게 할당하고, 강제노동으로 원주민을 착취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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