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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Dec 23. 2020

해양 강대국 영국의 등장

영국 vs 스페인 전쟁(1588)

오늘날 유럽의 27개 국가들은 EU(유럽연합) 회원으로 정치적 연대와 경제적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 회원국은 제집처럼 이웃 나라를 넘나들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에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 등 실용적인 측면에서 공동체 존속을 위한 조건들을 찾아내고 있지만, 지금 보다 훨씬 이전 유럽인들을 하나로 묶는 끈은 무엇이었을까? 공통분모는 로마 가톨릭 종교였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종교 공동체에 가까웠다. 391년 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기독교는 유럽의 정신과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유럽 문명과 문화의 뿌리는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하면서 단일 종교 공동체는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가톨릭과 개신교로 쪼개졌다. 구교와 신교. 종교개혁은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구교냐 신교냐에 따라 공동체는 이리저리 갈리고 합종연횡이 이루어졌다. 영국 헨리 8세(1491~1547 재위 1509-1547)의 등장은 종교공동체에 균열뿐 아니라 교황의 리더십에도 타격을 주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주창이 가톨릭 교단 전체의 각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공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1534년 헨리 8세가 교황 체제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로 한 것은 국왕 개인의 사적 동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국가마다 교황에 등을 돌리고 국왕의 종교적 신념과 정치 노선에 따라 구교 또는 신교를 선택할 수 있는 선례가 되었다.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이나 주목받는 인물도 드물다. 헨리 8세는 요절한 형의 아내이면서 왕비였던 캐서린과 결혼하였다. 캐서린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공동왕의 딸이었다. 둘 사이에 딸(메리 튜더)을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한 지 20년 만에 별거하였다. 혈기왕성했던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혼인하고 싶었다. 교황(클레멘스 7세)은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다. 헨리는 교황과 결별하고 수장령(首長令)으로 영국의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헨리 8세 스타일의 종교개혁이었다. 과격하게 표현하면 종교의 사유화였다.


16세기 유럽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본주의를 주창하는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종교 공동체의 색깔이 강했다. 특히 스페인은 가톨릭의 보호국으로서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영국만 해도 헨리 8세의 로마 가톨릭 탈퇴로 개신교 국가로 변모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톨릭 신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개신교의 뿌리는 탄탄하게 내리지 못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는 개신교를 지지했지만, 메리 여왕은 '피의 메리(Bloody Mary)'로 불릴 만큼 개신교와 성공회를 철저히 박해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개신교를 지지했다. 국왕이 어떤 종교적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마녀 사냥이 활개를 쳤다.



헨리 8세는 여섯 번 결혼했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 흉년이었다. 포인트는 앤 불린과 결혼하여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고, 엘리자베스가 아들이 귀한 튜더 왕조에서 우여곡절 끝에 여왕으로 등극하여 영국을 섬나라 후진국에서 해양 강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놓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주목한 이유이다. 그녀는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스페인과의 전쟁(1588년)에서 승리하고 유럽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여왕은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라고 천명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한 프랑스 루이 14세와 비교된다. 


영국과 스페인 전쟁의 원인은 여러 갈래로 분석되고 있다. 첫째, 구교와 신교의 갈등을 꼽을 수 있다. 가톨릭 보호국 스페인과 영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일탈에 불만이 컸던 교황이 합심해서 영국을 손보기로 한 것이었다. 둘째,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일부인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억제하고, 신세계에 있는 스페인령 영토와 대서양 보물 선단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셋째, 엘리자베스 퇴위를 위한 전쟁이었다. 넷째,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와의 갈등을 꼽을 수 있다. 메리 스튜어트는 개신교 신자들의 반란으로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이 헨리 8세 누나의 적손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국 왕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지만 1587년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견제하던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되자 스페인은 해적 도발을 핑계로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영국이 해양 강대국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과 스페인 전쟁에서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영국의 패배를 예측했다. 스페인은 해상 전투의 전력과 경험에서 객관적인 우위에 있었다. 괜히 무적함대(The Armada)가 아니었다. 전쟁은 전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영국군에게 대운이 따라주었다. 스페인 함대는 폭풍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웠고 함선이 난파되었다. 계획했던 보병과의 연합작전도 차질을 빚었다. 이 폭풍을 '프로테스탄트 바람(Protestant Wind)'라고 부른다. 하느님은 개신교의 손을 들어주었다. 영국의 운명을 가르는 전쟁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의 영국군이 승리함으로써 왕권을 보존할 수 있었고 영국이 해상 진출의 교두보를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을 라틴어로 메달에 새겼다.  Flavit Jehovah et Dissipati Sunt(God blew, and they were scattered.) "하느님이 바람을 불게 하니 적의 함선들이 뿔뿔이 사라졌다."


'The Armada'의 저자이면서 역사학자인 개릿 매팅리(Garrett Mattingly) 박사는 영국과 스페인 전쟁을 분석했다.


 "영국과 스페인 전쟁은 유럽을 격랑에 몰아넣은 가톨릭(구교) 세력과 프로테스탄트(신교) 세력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결과이자 정치적인 성격을 띤 전면전이었다. 1588년의 사람들에게는 영국해협에서 있었던 영국과 에스파냐 함대의 충돌은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 사이의 아마겟돈,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결전의 시작이었다. (중략) 그 전투의 결과에 따라 영국과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운명은 물론 기독교계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이 패하면서 가톨릭이라는 유일한 체제가 무너지고 민족국가가 만들어지는 발판이 마련됐다."


영국도 해상 패권을 쉽게 거머쥘 수는 없었다. 해상 패권은 곧 유럽을 넘어 세계의 패권을 의미했다. 스페인과 영국은 해상패권 자리를 놓고 칼레 해전을 포함하여 30여 년 간(1567~1604) 치열하게 싸웠다. 세계 3대 해전은 살라미스 해전(그리스 대 페르시아), 칼레 해전(영국 대 스페인), 트라팔가르 해전(영국 대 프랑스)이다. 영국은 칼레 해전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해가 지지 않은 나라' 대영제국의 초석을 놓았다. 대영 제국은 2차 세계 대전 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에 패권을 넘겨주었다.


Mattingly, G. (2005). The Armada. 콜린 박, 지소철 역(2012). 아르마다. 너머북스.  

https://en.wikipedia.org/wiki/He_blew_with_His_winds,_and_they_were_scattered

http://weekly.hankooki.com/lpage/world/202005/wk2020051314032214749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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