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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Feb 22. 2021

역사를 흐름을 바꾼 사건 ③

마르틴 루터의 보름스 종교재판

16세기 유럽의 종교 이야기를 해보자. 당시 유럽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 꽃의 향기는 일반 평민들의 생활이나 의식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말초신경까지 피가 돌지 않았다. 르네상스는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지만 동시대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종교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았다. 성경만 해도 구절을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귀족이나 성직자 등 소수에 한정되어 있어 무지한 민중들은 성직자들의 설교를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했다. 모국어조차 읽고 쓰기 힘든 백성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이해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종교는 정신문화의 한 유형이다. 16세기 유럽 민중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종교는 단연 기독교다. 유럽의 지리적, 정신적 공간은 기독교 문화라는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팽배했다. 종교의 속성으로 보면 다양성이 들어설 여백이 없었다. 지배적인 단일문화는 도그마로 변질되고 (정신적, 세속적) 지배자들은 타락과 부패의 유혹에 빠지기 싶다. 급기야 성직자들은 “돈 통에서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 천국을 향해 올라간다”라고 하면서 면죄부를 팔았다. 영혼구제를 담보로 한 판촉 전략으로 요즘말로 희대의 사기극이다. 교황은 세속적인 대기업 회장으로 유체이탈하였고 면죄부는 영혼구제용 상품이었다. 대주교는 계열사 사장이고 수사들은 세일즈맨으로 전락했다. 현세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사후에는 천국에 가고 싶어 갈망하는 가난한 백성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데 이 얼마나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유혹인가? 가톨릭에서는 면죄부를 악의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용어에 대한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2011년 3월 14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면죄부 용어의 오해와 가톨릭 교회에서 죄와 벌을 어떻게 사면하는가에 대해 설명하였다. 요약하여 옮겨본다. 면죄부는 가톨릭 교회가 금전적 대가를 받고 신자들의 죄를 사해주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면죄부는 대사(大赦, indulgence)의 오역으로, 대사부(大赦符)가 적절한 표현이다. 면죄가 죄를 완전히 면해 주는 것이라면, 대사는 죄가 아니라 죄에 따른 벌을 사면해 준다. 대사는 죗값에 해당하는 벌을 사면해주는 것이지 죄 자체를 사면할 효력은 없다. 용서와 죄를 구분하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으며, 고해성사 때 사제가 주는 보속(기도, 선행 등)을 통해 죄에 대한 보상이나 속죄를 한다. 대사는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으며, 대사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행위는 고해성사, 영성체, 기도, 성지 순례 등의 신앙 실천이다. 이러한 실천들은 어떠한 물질적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다. 현세에서 완전한 속죄를 하지 못하여, 죄에 따른 벌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참회하고 속죄하며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다 마치지 못하면 죽은 다음에라도 정화의 과정[煉獄]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벌을 사면해 주는 것이 바로 대사이다. 대사의 뿌리는 구약 사무엘 하권 12장에서 하느님이 다윗의 악행을 단죄하는 한편 용서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만하면 면죄부에 대한 오해는 풀렸을 것이다. 죄는 하나님만이 사면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교황과 주교는 벌을 면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개념이나 용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악의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오용 또는 오역되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게 된데에는 교회의 탓이 크다 할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도 대사 또는 대사부가 횡행했고 교회에서 민중들에게 대사부 판매를 위해 남발, 남용한 측면이 많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사의 오·남용은 이미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단죄되었고,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도 대사 오용의 위험을 경고했다. 


초기에 대사부는 지역의 성직자들이 장례를 치르고 난 유가족들의 심란한 마음, 다시 말해 고인이 천국행 기차를 탔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시행하였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신자들에게 사제의 대사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본격적으로 대사부를 정치적, 세속적으로 이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 참전을 장려할 목적으로 참전 군인들과 군부대에 후원금을 낸 후원자들에게 교황의 권한으로 대사부를 발급해주었다. 16세기 교황 레오 10세에 이르러 교황청의 부채 탕감과 교회 건축 비용을 위한 자금 모금 방안으로 대대적으로 활용되었다. 수도사들이 대사부 판매원으로 나섰다. 


16세기 루터가 종교개혁에 신호탄을 당겼던 시기에 대사부 발급 비용이 궁금할 것이다. 판매가는 1/4 플로린.  평민의 작은 집 6개월치 월세 또는 송아지 세 마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니 거액이다. 대사부 구입비 말고도 각종 세금에도 힘겨워하는 일반 평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챙기고 이렇게 조성된 돈은 교황청으로 흘러갔다. 루터는 97개조 반박문 86조에서 이렇게 반박한다.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중세 기독교의 대사(부)에 얽힌 내막을 알면 종교개혁의 필연성은 자연히 따로 오게 된다. 이 정도로 부패한 교회의 행태를 보면 루터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이슈가 제기되고 교단에서 개혁 방안이 나왔을 성싶다. 교회 개혁에 필요한 임계치를 훨씬 넘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성당 교회(Castle Church) 출입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동시에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 판매 책임자로 임명한 알브레히트(Albrecht) 대주교에게도 반박문을 보냈다. 원제목은 “면죄의 능력과 유효성에 대한 논쟁(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다. 토론 제기 방식의 양심선언이었다. 면죄란 주제를 놓고 토론해보자는 것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을 보면 아무나 쉽게 나열한 조항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웬만큼 성경과 교리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반박문이 나오기 어렵다. 비덴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이면서 목회사였던 루터는 누구와 교리를 놓고 토론을 해도 자신 있다는 방증이다. 토론의 쟁점은 간단하다. '인간이 지은 죄는 교황조차도 면죄할 수 없다. 사면권은 하느님에게 있다. 면죄받기 위해서는 참된 회개가 필요하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은 마르틴 루터가 1521년 4월 18일 보름스(Worms) 제국의회의 종교재판에 죽음을 무릅쓰고 출두한 일을 이렇게 평가한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인류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루터는 의회 재판관들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이렇게 고백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개최한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켜낸 루터는 더 이상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로마 교황청이 루터를 파문(1521년 1월 3일)한 데 이어 황제도 루터를 파문하여 응징했다. 법적으로는 누군가 그를 살해한다고 해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대학에서도 루터의 가르침을 정죄했다. 당시 독일은 선제후 체제였다. 선제후들이 모여 국왕을 선출했다. 다행히 비덴베르크 대학 설립자이면서 작센의 선제후인 현명공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Ⅲ der Weise 1463-1525)가 루터를 보호하고 나섰다. 프리드리히는 교황청에서 루터를 소환했지만 거부했다. 로마로 보내졌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가 신변안전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면 미완의 종교개혁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루터는 작센의 선제후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신변안전은 물론 교회사와 독일어에서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1522년 9월에 출판했다. ‘9월 성서(Septemberbible)’다. 루터가 성서를 번역하는 원칙은 시장 사람들, 가정주부들, 거리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독일 기독교인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시켰다. 더 이상 특정인을 위한 성경이 아니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본은 현대의 표준 독일어의 토대가 되었고 독일어 문법이 통일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평민들이 사용하는 단순하게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여 독일어 성경을 완성했다. 루터는 성서 완역본을 제일 먼저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에게 증정한다. 선제후는 사람 보는 안목이 높았다. 루터가 사망할 때까지 이 성경이 10만 부 정도 판매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밀리언셀러다. 민중들이 얼마나 쉽게 쓰여진 성경을 갈망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소식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일이 잘 되려면 주변의 여건이 따라주어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려는 세력도 있었다. 비텐베르크대학의 동료 교수 안드레아 카를슈타트(Andreas Karlstadt)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그는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은 무용하고 성당의 성상까지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동화된 시민들은 실제로 성상을 파괴했다. 루터는 폭력에 결단코 반대했다. "나는 어느 누구도 폭력과 피 흘림을 가지고서 복음을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말씀을 통해 세상은 정복되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받으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부흥한다." 그의 메시지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으로 요약된다. 오늘날 개신교의 목회 비전은 루터의 세 가지 메시지 그대로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일어난 문예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이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세를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의 절정기는 종교개혁이 아닐까 싶다. 개천의 물이 모여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는 것처럼 16세기 사회지도층과 백성들의 의식 속에 형성된 인문사상이 모여 종교개혁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으로 신교와 구교가 분열되면서 그 꽃을 피운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500년도 지났다. 현대인과 중세인들의 영혼관이나 천국관은 어떻게 다를까 싶다.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사후에 천국에 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오늘날에도 천국에 가고 싶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이용해 대사부를 판매했던 중세 기독교의 행태가 없어졌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용기 있는 한 사제의 양심선언으로 대개혁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루터는 평생 구혼의 문제를 고민한 신앙인이었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알고자 한 목회자이기도 했다.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개혁은 종결이 아니고 진행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가톨릭신문. 대사부(大赦符) 용어가 적절한 표현. 2011년 3월 27일.

백승현(2008). 종교개혁의 배경에 관한 정치사상적 고찰. 사회과학연구, 34권 3호.

주경철(2017).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서울: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크리스천 투데이.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중심주제. 2017년 10월 31일.

영화 <루터(2003년)>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A6%84%EC%8A%A4_%EC%9D%98%ED%9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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