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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r 02. 2021

역사의 ‘정의’에 공소시효는 없다 ③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P. Floyd)의 사망 사건은 세 명의 백인 경찰들이 한 명의 흑인 청년을 질식사시키면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은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에 의한 고의적 살인 사건으로 미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급기야 역사 속에 자행된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의 주역들을 전면으로 끌어내어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영웅들이 인종차별자로 학살자로 전락하였다. 역사는 엄중한 심판자다. 그들의 가면을 벗겨 진면목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세계시민으로부터 혹독한 평가와 심판을 당한 인물들 중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있다. 그는 탐험가로 신대륙 발견이라는 영웅 대접을 받아 왔지만 실상 아메리카 원주민을 착취, 혹사, 살인을 저지른 인종차별자로 학살자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유럽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여파로 재조명된 인물이 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1835-1909)다.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여기서는 약칭으로 '콩고'로 함)에서 100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살상한 대량 학살자였다. 그의 악행을 아는 사람은 그를 아프리카의 히틀러, 대학살의 주범 스탈린, 크메르 킬링필드의 주범,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치 않는다. 


유럽의 벨기에가 제국주의 반열에 올랐다는 역사적 사실도 낯설다. 벨기에가 중앙아프리카의 콩고를 식민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국가들의 세력 다툼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탓이다. 당시 유럽 국가들 중 국력이나 국제 사회의 위상을 보면 소국 벨기에가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은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벨기에는 1830년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레오폴드 2세는 해외 식민지 개척이 부국강병을 이루는 기회로 보았다. 1865년 왕위에 오른 그는 처음에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사들이고 싶었지만 정치적, 재정적인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였다. 


레오폴드 2세에게 기회가 왔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주최한 베를린-서아프리카 회의(1884년)에서 아프리카를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분할했다. 비스마르크의 관심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드넓은 땅덩어리는 물건 경매하듯 쪼개져 제국주의들의 손에 넘겨졌다. 거대한 콩고 분지(Congo Basin)가 벨기에에 낙찰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1885년 콩고 자유국가(Congo Free State)를 수립하고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한다. 


벨기에는 국가 차원에서 콩고를 식민통치를 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콩고 분지가 국왕 레오폴드 2세 개인 사유지로 탈바꿈하였다. 벨기에 의회가 식민지 경영에 반대하면서 국왕 개인의 사유지로 통치되었다. 한 국가가 개인의 사유지가 되는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콩고는 나의 재산이다. 콩고 사람들은 나의 노예이다. 콩고에서 산출되는 모든 것들은 내 것이다. 내 허락을 받지 않고 콩고의 영토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내가 정한 법에 따라 다루어질 것이다."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 면적은 200여만㎢였다. 이 면적은 콩고의 320여 종족이 소유한 땅으로 벨기에 면적의 75배에 해당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와 콩고인들을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데 철저히 이용했다. 그에게 콩고는 채무, 통치자금, 군대유지 비용 마련을 위한 상아, 다이아몬드, 고무 등 천연광물을 수탈, 착취하는 대규모 사업장에 불과했다. 마침 자전거(1891년)와 자동차(1895년)에 필요한 천연고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콩고는 국토의 절반이 천연고무 산지였다. 레오폴드 2세는 고무 수확의 극대화를 위해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했다. 어른 아이 할 것 같이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손목과 다리를 잘랐다. 제국주의의 후발국가였던 벨기에가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주의들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인무도한 식민지배를 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서 2억 2천만 프랑(11억 달러)의 이윤을 챙겼다.


<손가락 잘린 콩고인들>

조지 W. 윌리암스(George W. Williams 1849–1891)는 콩고에서 벌어진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잔학상을 국제사회에 폭로했다. 윌리암스는 미국의 역사학자, 언론인, 법률가, 목회자로 1889년 작품 구상을 위해 유럽을 방문할 때 우연히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국왕과의 인터뷰에서 콩고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고 콩고의 발전상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의 기대는 환상으로 바뀌었다. 그곳은 국왕이 고용한 대리인들이 콩고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수탈, 약탈, 살인이 일상화된 거대한 킬링 필드였다. 상아, 금, 고무 등의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왕이 고용한 사병과 대리인들이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했다. 1890년 7월 18일 윌리암스는 레오폴드 2세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국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을 낱낱이 폭로했다. 국제사회에도 콩고에서 벌어진 참상을 조사할 것을 호소했다. 


벨기에와 레오폴드 2세의 수탈, 착취, 잔혹 행위를 다룬 영화가 2016년 <레전드 오브 타잔(The Legend of Tarzan)>이다. 이 영화에는 실명의 조지 윌리암스가 콩고에서 벌어지는 만행 현장을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문학작품에서도 벨기에와 레오폴드 2세의 만행을 고발했다. 폴란드계 영국인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 1857-1924)는 콩고강을 따라 화물을 수송하는 벨기에 증기선의 선장이었다. 그는 실제 겪었던 사건들을 각색하여 1899년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을 펴냈다. 이 중편소설은 서양이 후진국의 문명화(civilization)라는 가면을 쓰고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을 저지르는 제국주의를 고발할 뿐 아니라 특히 벨기에와 레오폴드 2세의 잔혹성과 대학살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탄을 이끌어냈다. 1998년 애덤 호크실드( Adam Hochschild)의 저작 <레오폴드 2세의 유령(King Leopold's Ghost)>도 벨기에와 레오폴드 2세의 만행을 대중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예술과 문학의 힘이다.


콩고에서 벌어진 잔학상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 있다.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탐험가이자 언론인이다. 아프리카에서 실종된 리빙스턴을 찾아 유명해졌다. 레오폴드 2세는 스탠리를 앞세워 콩고 지배의 야욕을 교묘하게 위장했다. 야욕과 음모의 탈을 쓴 후원자의 재정지원을 받으면 그 뒤끝이 아름답지 못하다. 스탠리의 탐험 결과를 레오폴드 2세는 철저히 악용한 셈이다. 탐험가로서 유명세를 얻은 스탠리는 억울할 수 있다.


벨기에 정부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력으로 콩고를 식민지로 병합한다. 레오폴드 2세가 지배한 23년(1885-1908)이 지난 후였다. 그 기간에 콩고에서 약 1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50여 년이 더 흐른 1960년에야 콩고는 벨기에에서 독립했다. 


벨기에 정부는 콩고와 콩고인에게 과거사를 사과하는 데 인색했다. 벨기에 정부는 콩고 대학살을 국왕 사유지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개인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거나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국왕이 정부에서 돈을 빌리고 이 돈을 자본으로 삼아 사유지를 개발하였음에도 정부의 개입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우겼다. 국왕은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벨기에 정부의 말대로라면 벨기에 국왕은 국가를 대표하는 왕이 아니라 개인에 불과한 셈이다. 변명도 그럴듯해야 한다. 


벨기에는 ‘아프리카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되풀이했다. 익숙한 논리다. 일본이 한국의 식민통치기에 벌어진 온갖 만행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는커녕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논리와 똑같다. 제국주의자의 근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것 같다. 언론은 이렇게 비판했다. '벨기에가 거대한 망각(The Great Forgetting)에 빠져 있다.'


2020년 6월 30일 벨기에 필리프 국왕은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에게 과거 역사에 대해 사과했다. "과거의 상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싶다.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로 되살아나고 있다.” 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지 60년 만에 이루어진 사과다. 사과치고는 너무 완곡하고 진정성도 의심된다. 이럴 땐 화끈하게 사과해야 한다. '정말 잘못했다. 사죄한다. 용서를 구한다.' 과거사를 깔끔히 털고 가야 미래의 건강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물타기 하듯 뜨뜻미지근한 사과는 상처 받은 국가와 국민들의 상처를 덧낼 수 있으니 말이다. 1970년 서독의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에서 나치 만행을 기억하고자 세운 유대인 봉기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이후로 독일은 잊을만하면 사죄하고 반성한다. 벨기에나 일본은 독일의 사죄 외교를 배워야 한다.  

 

미국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질식사는 지구촌 곳곳에서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상기시키는 대각성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벨기에 시민들도 거리로 나왔다. 시민들은 레오폴드 2세의 동상과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도 없애자고 주장했다. “레오폴드 2세 동상이 브뤼셀에 있는 것은 히틀러 동상이 베를린에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2019년 초 벨기에의 인종차별 문제 등을 조사한 ‘유엔 전문가 워킹그룹’에 따르면, 벨기에 초·중등 교과 과정에 왜곡된 식민 통치 역사 담겨 있고, 교과 과정도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행태와 비슷하다. 벨기에는 해외 식민지 개척에 늦게 출발한 제국주의로서 이웃 제국주의 국가들을 흉보면서 나쁜 짓만 골라서 한 국가였다. 진짜 문제는 과거 행동에 대한 솔직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잘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후세에게 왜곡된 역사를 물러주는 국가는 나쁜 국가이고 그런 정치가는 악마다. 역사는 민족의 혼이다. 역사 왜곡은 혼을 피폐시키고 망가뜨리는 엄청난 범죄 행위다. 잘했건 잘못했건 그 자체가 역사다. 


브뤼셀에는 유럽연합의 본부가 있다. 유럽의 수도이며 심장부다. 오늘의 벨기에와 국민들이 누리는 부의 토대는 약 150년 전 검은 대륙 콩고에서 가져온 천연광물 덕분이다. 레오폴드 2세가 세웠다는 건축물들이 증거다. 벨기에가 더 이상 <어둠의 심장>의 커츠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역사의 날 선 정의의 칼날이 언제 내려칠지 모른다.    



이종찬(2016). 열대의 서구, 조선의 열대. 서울: 서강대출판부. 

중앙일보. 지역갈등 끝판왕 벨기에… 독일서 수입한 왕실이 해결사?. 2018년 1월 13일.

중앙일보. 콩고人 손목 수백만 개 사라졌다, 레오폴드 대학살. 2018년 2월 17일.

한겨레. 벨기에는 왜 60년 ‘침묵의 전통’ 깨고 콩고에 사과했나?. 2020년 7월 8일.

Hochschild. A. (1998). King Leopold's Ghost - A Story of Greed, Terror, and Heroism in Colonial Africa. 이종인 역(2003). 레오폴드왕의 유령. 서울: 무우수.

Winegard, T. C. (2019). The Mosquito. 서종민 역(2020). 모기. 서울: (주)로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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