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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Apr 26. 2022

운디드니의 비가(悲歌)

아메리칸 인디언의 운명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영토 쟁탈에 대한 이야기로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 18세기 이후 유럽 국가들은 중상주의와 함께 해외 식민지 개척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본격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였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에 이어 해양 강대국으로 부상한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대신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경영에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여토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 서부는 해양과 신대륙 개척에 선두주자였던 스페인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영국은 동부 13개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했다. 오늘날의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주가 해당한다.


영국은 동부 지역에서 중서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이라 부르는데 프랑스가 인디언과 손잡고 영국에 대항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만 해도 동부 식민지는 영국 편에서 프랑스와 싸웠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제2차 백년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전쟁에서는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유럽에서 벌어진 제1차 백년전쟁(1337~1453)은 무려 116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어졌다. 지구 상에서 십자군 전쟁 이후 가장 긴 전쟁일 것이다. 영국은 대영제국으로 불리는 만큼 전 지구적으로 많은 지역의 식민지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잦은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전비(戰費) 충당에 골몰하였고, 이를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각종 명목의 과세를 했다. 이때 유명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의 독립주의자들은 식민지 대표를 영국 의회에 파견한 적도 없는데 의회에서 단독으로 식민지 과세를 결정하고 부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면서 과세를 보이콧했다. 과세 보이콧은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결국에는 독립전쟁(1775~1783)으로 치닫게 되었다. 식민지에서는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영국군에 맞섰다. 독립전쟁 중인 1776년 7월 4일 미국은 일방적으로 독립선언을 발표하지만 어디까지 선언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독립 승인은 1783년 9월 3일 파리협약을 통해서이다. 조약 발효일은 1784년 5월 12일이다.


여담이지만 오늘날 미국은 매년 7월 4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독립기념행사를 열고 있는데, 역사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실(史實)을 직시한다면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파리협약에서 독립 승인을 한 9월 3일이거나 조약이 발효된 5월 12일이어야 할 것이다. 7월 4일은 독립을 선언한 날에 불과하다. 정확히는 독립선언기념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지만, 해방일을 8월 15일이 아니라 3월 1일로 계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의 13개 식민지는 영국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 13개 주가 합중국을 수립하였다. 연방정부 수립 이후 동부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이 발달하고 타 지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부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해나간다. 이는 러시아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동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신생 독립국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대륙의 영토 확장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틀리지 않았다. '지구 상에서 최초의 영토를 기준으로 몇 배나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 외에 다른 국가가 있을까 싶다. 로마도 페르시아도 몽골도 그 넓은 영토를 점령하거나 지배했지만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미국 사우스타코타주 러시모어산에는 네 명의 대통령 조각상이 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비롯,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전직 대통령 4명의 '큰 바위 얼굴'이다. 이 조각상은 1927년부터 1941년까지 조각가 거즌 보글러와 인부 400명이 작업해 만들었다. 사우스다코타주의 관광 증진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어떤 대통령이 조각상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미국사를 볼 때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초대 대통령 워싱턴(재임 1789~1797)과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1861~1865)이 주인공으로 포함된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들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업적을 쌓으면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인들도 위대한 대통령으로 인식하고 있다. 제퍼슨과 루스벨트는 어떻게 주인공이 되었을까? 이들은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대통령들이다. 제퍼슨 대통령(재임 1801~1809)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1803년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에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당시에는 쓸모없는 땅을 산다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루이지애나 영토를 구입함으로써 서부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오늘날 제퍼슨은  미국이 광대한 지리를 차지하게 되도록 밑그림을 그리고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1901~1909)은 1903년 파나마 운하 지대를 획득하여 미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미국이 동부에서 중부와 서부로의 영토 확장은 인디언 학살로 연결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꼴이다. 인디언은 원래 미국 땅의 원주민, 즉 Native American이다. '인디언'이란 용어는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을 위한 항해를 하면서 처음 도착한 곳이 카리브해 바하마 군도의 한 섬이었는데, 이곳을 동양의 인도(India)라고 생각하고 원주민들을 인디언(Indian)으로 불렀다. 영어식으로 하면 인도사람이다. 당시 지리학자들은 인도가 대서양의 서안에 있다고 믿었다. 콜럼버스는 쿠바와 아이티를 발견하였을 때 이 지역을 일본으로 생각할 정도로 오늘날과 판이하게 다른 지리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은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까지의 학설에 따르면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시베리아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로 이동했다는 설과 폴리네시아족 또는 멜라네시아족 중 소수가 아메리카에 이주해왔다는 설이 있다. 인디언이 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왔든 아메리카의 문명은 독자적으로 수천 년간에 걸쳐 발전하였다. 인디언들은 쟁기도 없이 옥수수, 강낭콩, 감자, 카사바, 카카오, 담배, 목화 등을 재배하고 있었다(모로아 1994, 14-15). 


저자도 북아메리카에서 거주했던 인디언들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2011년 1월 콜로나도 남서부 코르테즈 메사 버드 국립공원(Mesa Verde National Park)을 방문했다. 그때 저자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곳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일생에 꼭 가보야 할 50곳 중 하나로 선정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선사시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깊은 산속 계곡에 위치한 절벽 안에 집을 짓고 부족생활을 한 불가사의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가파른 계곡의 바위를 지붕으로 삼고 600여 명의 인디언들이 살았다고 한다. 인간의 생존 본능과 지혜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은 해발 2,600m가 넘는 고지대로 일교차가 심해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쉽지 않은 환경으로 보였다. 수백 개의 벼랑 거주지(cliff dwellings)를 보면서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고 그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일군 원주민들의 저력에 압도되었다. 이곳은 선사시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남긴 우수한 문화로 평가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고 한다. 국립공원 내 박물관에는 원주민 후손들이 자리를 지키면서 안내를 해주었다. 1978년 UNESCO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e Heritage)으로 등록되었으며, 매년 수많은 관광객과 인류학자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2021년 3월 뉴멕시코주 지역의 라구나 푸에블로 원주민 부족을 조상으로 둔 원주민계인 데브라 할런드가 연방의회 상원 인준을 통과하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내부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원주민 출신 장관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구촌에서 가장 다문화, 다민족 국가의 정체성에 맞는 인종적으로 다양성 내각을 꾸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내무부 장관은 북미·알래스카 원주민 정책을 비롯해 에너지, 토지, 수자원, 국립공원, 멸종위기종 관리 등 환경·생태 보전 정책을 총괄한다. 백인에게 학살당하고 거주지에서 내쫓겨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내몰리던 원주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원주민 출신이 원주민 정책을 총괄한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이렇듯 북미의 인디언들은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부족 간에 교류를 하는 가운데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고유의 문화를 일구면서 살았다. 그들만의 공존공영방식을 터득하였다. 역사는 항상 '방문객'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발전의 모멘텀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인디언들은 17세기 영국 방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인디언들은 대륙에 이주해 온 이주민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의식으로 지키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도 영국에서 이주해 온 백인과 아메리칸 인디언 간의 인도적인 교류와 우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날은 우리나라 명절인 '추석'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눈다. 추수감사절은 1620년경 영국에서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식민지로 이주한 이민자들이 첫 수확을 기념하는 행사에 기원을 둔다. 청교도들인 이민자들은 플리머스에 도착한 첫해 겨울 102명 중 절반가량이 사망했는데, 원주민들의 따뜻한 도움이 없었다면 거의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원주민들은 백인 정착민들에게 곳간에서 옥수수를 나누어주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브라운 2003). 이듬해 1621년 가을, 추수를 마치고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어려울 때 농사를 가르쳐주어 굶어 죽지 않도록 도움을 준 인디언 부족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추수감사절의 유래이고 1789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토착 원주민인 인디언과 방문객인 백인들 간에 긴장과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백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더 넓은 영토를 필요로 했고 차츰 영국 이외의 다른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서로의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면서 아메리카 대륙은 탐욕과 광기의 전쟁터가 되었다. 손님이었던 이주민들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준 인디언 친구들의 우정과 신의를 저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내몰고 학살하면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주객전도다. 이제 아메리카 대륙은 피아(彼我) 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으로 변질되었고 유럽 제국주의의 영토 쟁탈전의 무대로 바뀌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은 영토 확장에 따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철학을 수립했다. 철학이라고 이름 붙이면 거창하고 어색하지만, 미국식 제국주의 철학인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 '명백한 운명'은 1845년 '뉴욕 모닝 뉴스'의 사주이면서 저널리스트 존 오설리번(1813~1895)이 "신이 미국과 미국인에게 영토 팽창의 사명을 부여했다"는 칼럼을 쓰면서 유래되었다. 오설리번은 미국인은 '신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남의 땅을 빼앗을 권리를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 괴변도 이만저만이 아니며 인간이 신을 들먹이면서 거짓과 위선의 새까만 속마음을 현란한 구호로 위장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의 결정판이다. 솔직하게 남의 땅이 욕심나서 빼앗야겠다는 말이 아니라 신을 팔았다. 누구를 위한 신이란 말인가? 결국 미국의 정치인들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미국인들이 신대륙을 지배하도록 운명 지어졌기 때문에 인디언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브라운 2003, 27-28). 남의 땅을 빼앗기 위한 총과 칼은 준비되어 있는 가운데 그럴듯한 대의명분이 필요할 때 오설리번의 칼럼이 눈에 띄었다. 무력과 철학으로 무장한 미국은 전쟁을 불사하며 서남부 지역의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을 빼앗았다. 침략자 미국과 미국인에게는 영토 확보 전쟁은 '신성한 임무(divine imperative)'가 되었다. '명백한 운명'이니 '신성한 임무'니 하는 말은 미국인의 땅에 대한 탐욕을 고상한 차원으로 승화시킨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저자는 미국식 제국주의의 철학이 된 '명백한 운명'은 현대 미국에서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전이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미국 예외주의가 무엇인가? 미국은 지구 상에서 유일무이한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것도 미국에는 자동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다이아몬드 2019, 470). 미국은 다른 국가나 역사에서 더 이상 배울 교훈이 없다는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물론 미국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국가나 월등한 군사적, 경제적 우위에다 선민의식을 더하면 유아독존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교만은 언젠가는 자멸에 이른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쯤 해서 운디니드 언덕에서 벌어진 인디언 학살 참극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었다. 백인들이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에 상륙할 당시에 미국 인디언 인구는 60만 명에서 9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1860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인구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1890년 사우스타코타주 남서부 운디드니(wounded knee)의 비극은 예고되어 있었다. '명백한 운명'이니 '신성한 임무'라는 신념으로 무장한 백인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에 수용되지 않은 인디언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운디드니 언덕에는 인디언 남자 120명, 아이들과 여자들 230명 등 도합 350명가량이 모였다. 미국 제7기병대 500여 명의 병사들이 인디언들을 둘러싸고 언덕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인디언의 무장해제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총을 발사했고 연이어 기관총이 난사되었다. 인디언 성인 남자 등 290여 명이 숨지고 5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군들도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대부분 동료 미군의 총알이나 기관총의 유탄을 맞은 사람들이었다(브라운 2003, 685-695). 미국 정부는 이 사태를 운디드니 전투(battle)라고 부르고, 인디언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정황상 인디언이 먼저 기병대를 향해 총을 쐈을 가능성보다 리틀빅혼 전투에서 수족에게 참패를 당한 제7기병대의 복수심이 참극을 낳았다는 설이 유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리틀빅혼 전투란 1876년 미 육군 제7기병대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대장이 몬태나주 리틀빅혼에서 수우족 인디언 3,000명에게 포위되어 265명 부하들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사건을 말한다. 제7기병대의 연대 병력 절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인디언의 경우는 27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던 커스터의 패배와 죽음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운디드니의 학살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더 강력한 무력을 사용하여 인디언을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시켰다. 미국 정부는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신의 이름을 빌린 '명백한 운명'이니 '신성한 임무'니 하는 용어의 정체성도 드러났다. 그것은 제국주의 미국의 탐욕과 광기가 불러낸 미신의 댄스였다. 운디드니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인디언 처녀의 증언이다.  


우리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들소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쏘아 댔다. 나는 백인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군들은 비열한 자들이었다. 아녀자에게 총을 쏘아 대다니! 인디언 전사라면 백인 아이들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브라운 2002, 694).


사우스타코타주 러시모어산에는 미국을 빛낸 역대 대통령 네 명의 얼굴 조각상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통령들이 사우스타코타주 운디드니 언덕에서 벌어진 인디언 학살의 참극을 어떻게 생각할까 싶다. 분명한 것은 운디드니(wounded knee)은 글자그대로 미국 역사의 무릎에 심각한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릎에 상처가 나면 절름발이가 되는 것처럼 오늘날 미국이 민주주의, 인권, 주권 등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해 떠들고 있지만, 끔찍했던 과거 역사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역사의 엄중한 교훈을 상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원주민들은 ‘큰 바위 얼굴’ 맞은편에 몬태나주 리틀빅혼에서 미 제7기병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인디언 추장이면서 전사였던 ‘크레이지 호스(1840년대~1877)’의 머리상 제작을 마치고, 몸체와 그가 탄 말을 만들고 있다. 원주민들은 미 제7기병대와 맞붙어 대승을 거둔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1939년부터 대통령 얼굴 조각상이 있는 곳에서 27km 떨어진 러시모어 산자락에서 울려퍼지는 망치소리는 미국인의 양심을 울리고 있다.



다이아몬드, 재레드. (2019).《대변동》. 강주헌 옮김. 김영사.

모로아, 앙드레. (1994).《미국사》. 신용석 옮김. 기린원.

브라운, 디. (2003).《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최준석 옮김. 나무 심는 사람.

브링클리, 앨런. (2005).《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 황혜성 외 옮김. 휴머니스트.

정경민. (2011).《중앙일보》. <‘크레이지 호스’ 전설의 부활>. 9월 7일.

박진배. (2022).《조선일보》. <미국 인디언 유적지>. 4월 28일.

최윤필. (2015).《한국일보》. <운디드니 학살, 인디언 소탕해 서부개척 美의 '상처난 무릎'>. 12월 29일.

최현준. (2021). 《할런드, 미 내무장관 인준…첫 원주민 장관 탄생》. 3월 16일.

메사 버드 국립공원 https://heritage.unesc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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