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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Apr 29. 2022

부러운 형제

① 정약전과 정약용의 가슴 시린 우애

저자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라도 화순 산골에서 광주로 전학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화순에서 부모님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6남매를 키우고 공부시켰다. 공부에 재미를 붙인 저자는 도시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농촌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공부를 핑계로 도피를 한 셈이었다. 마침 두 형들이 광주에서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촌향도(離村向都), 즉 농촌을 떠나 도회지로 이주하는 현상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됨에 따라 당국에서는 시골 학생의 도시학교 전학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저자는 운 좋게 큰형의 노력으로 광주의 초등학교로 전학할 수 있었다.


저자의 뜻대로 전학을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삼 형제가 고달픈 자취생활을 하였다.  부모님과 함께 고향에서 생활하면 몸은 힘이 들어도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저자가 선택한 결정이니 내색을 하거나 불편을 드러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주로 방청소와 밥을 짓고 작은형은 빨래방번이었다. 큰형은 ROTC 후보생으로 학교 공부와 군사훈련을 하기에도 바빴다. 가끔 큰형은 늦은 밤에 친구들을 데려왔고 통금으로 여러 명이 좁은 방에서 잠을 잤다. 형 친구들이 늦은 밤에 들이닦치면 선잠을 깬 눈을 비비며 라면을 끓이거나 '보름달' 빵을 사 왔다. 형 친구들은 어린 동생을 귀엽게 생각하여 아껴주었고 어쩌다 흥이 돌면 시(詩)를 지어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지금도 저자가 시집을 끼고 사는 것은 그때 큰형 친구들이 반강제적으로 시킨 시작(詩作)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저자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추억이 있다. 매주 한 번 화순에서 쌀이며 반찬을 가져오는데 금요일에 쌀이 떨어졌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고 지금처럼 '햇반'과 같은 간편식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형 친구들이 오면 배급에 문제가 생기곤 한다. 자취생에게 식량이 떨어진 것은 큰 일이다. 평소 영양보충을 잘하지 못하는 터에 제때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으려고 하는 데 형들 밥은 없고 달랑 한 공기만 밥상에 놓여있었다. "형들은 먹지 않아요?" "우리는 먼저 먹었다." 나는 그런 줄만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쌀이 떨어져 동생에게만 밥을 먹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 주에는 친구들이 많이 와 라면조차 살 돈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형제들의 우애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형제간의 우애를 긍지로 삼고 있다. 이런 자랑질을 하면 팔푼이 소리를 들어도 괘념치 않으련다. 어릴 적부터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형제들의 마음속에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쟁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각박한 세상에 형제들의 우애야말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엄청난 에너지원이다. 저자가 팔푼이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자랑질을 서슴지 않았던 형제애도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의 형제애를 알게 되면 꼬리를 내리고 만다. 조선 후기 촉망받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형극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손암과 다산의 형제애는 이 세상에 우애란 무엇이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답이 된다.


손암 정약전(1758~1816)과 다산 정약용(1762~1836) 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둘의 가계(家系)를 살펴봐야 한다. 형제의 조상은 8대가 연속하여 홍문관[옥당(玉堂)이라고 부르며, 조선시대 홍문관직을 역임하였던 사람들을 기록한 인명록(옥당선생안(玉堂先生案)이 따로 있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고 인품이 빼어난 인물들이 뽑힌다]을 배출한 명망 높은 사대부였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이고 모계는 해남 윤씨로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후손이며, 조선의 유명한 서화가인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의 손녀이다.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의 오대 손녀인 윤소온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다. 형제의 가문은 반듯한 권문세가로 대대로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열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송시열에 맞서기도 한 남인의 영수 고산 윤선도 가문이 외척이다. 이렇듯 붕당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정치 영역말고도 사회 관습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 혼인도 같은 정파 간에 이루어졌다.


손암(巽庵 섬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는 뜻)과 다산의 집안은 정조의 죽음과 천주교로 인해 폐족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난다. 얽힌 사연을 살펴보자. 첫째 약현의 딸은 황사영(1775~1801)과 결혼하였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한양을 벗어나 충북 제천 배론에 숨어 지내다 체포되었다. 그는 숨어 지내던 중에 조선에서 천주교인 박해의 실상을 중국 베이징 주교에게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청나라의 무력 동원을 요청하는 '백서(帛書)'를 작성하였는데 전달하려다 발각되어 체포, 순교했다. 조선은 그의 가족들을 노비 신분으로 강등하여 귀양 보내고 집은 우물로 만들었다. 또 형제의 누님은 조선인 최초로 중국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았던 이승훈(1756~1801)에게 출가하였다. 조선 후기 본격적인 천주교 보급과 전파와 관련하여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황사영과 이승훈은 손암다산의 조카사위로 그리고 처남 매부 간의 혈연으로 엮였다.


형제의 외가 역시 조선 후기 천주교 순교와 관련이 깊다. 조선에서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순교한 최초의 인물은 윤지충(1759~1791)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이다. 특히 윤지충은 손암과 다산의 외사촌으로 진산사건(정조 15년, 1791년)의 주인공이다. 진산사건은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이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폐제분주(廢祭焚主), 즉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사건이었다. 조선은 유학의 원리가 통치이념이고 유의 핵심은 충과 효다. 이 사건은 유학의 핵심 원리인 충과 효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역모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서 조선 후기 천주교 신앙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던 제사 문제를 짚고 가자. 1583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만 해도 선교사들은 동양의 전통사상과 융합하는 방식으로 신앙 보급을 했다. 그러나 도미니크파와 프란체스코파가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두 교파는 교황에게 전통사상과 융합하는 방식의 예수회의 선교 방식을 금지하도록 요청했다. 교단에서도 논쟁을 거듭한 끝에 18세기 초중반 교황은 동양에서 조상의 제사를 엄금시켰다. 하물며 교황은 중국 내 예수회의 전교 활동을 금지시켰고, 예수회 본부를 해산시키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까지 했다(이덕일, 2015). 


사실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된 초창기만해도 천주교 신앙과 제사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조선 천주교는 초창기 성직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중요한 교리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북경에 사람을 보내 유권해석을 구하였다. 나무장수 출신 윤유일은 유권해석을 구하기 위해 북경에 드나들었는데, 1790년 북경에서 돌아와서는 "천주교에서는 조상 제사를 금한다"라는 사실을 신자들에 알렸다(허경진, 2016: 261-263).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제사를 금지한다는 로마 교황청의 공식적 견해를 들었을 때 발칵 뒤집어졌다. 특히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조선 성리학의 교조화였다. 노론이 집권하면서 성리학 외의 모든 사상체계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였다. 사문이란 유학을 가리키며, 사문난적은 유학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역적이라는 뜻이다. 둘째, 천주교 신앙인의 대다수가 남인이었다. 노론은 정조가 남인을 중용하려하자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들을 실각시키려 했다. 셋째, 로마 교황청의 경직된 교리 해석때문이었다. 특히 제사와 장례 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경직된 해석과 강요는 노론뿐 아니라 대다수 조선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이덕일, 2015: 120~124 재인용).


이런 상황에서 윤지충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른 사건은 조선 조정과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그 충격은 컸다. 윤지충은 어떻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윤지충은 다산을 통해 천주학을 접하고 교리를 독학하면서 궁금한 점은 정약종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1789년에는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윤지충은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순교했다. 우리나라 천주교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김범우가 두 순교자보다 먼저 순교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범우(1751~1786)는 현장에서 사형되지 않았을 뿐이지 배교를 거부하고 유배 중에 형으로 생긴 상처의 악화로 1년만사망하였기 때문이다(천주교에서는 현장에서 순교하지 않은 경우에는 순교자가 아니라 증거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 선언을 할 때, 윤지충을 124위 중 첫 번째 복자로 서품 하였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현재 명동)에 명동성당이 세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당한 자리에는 전주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그들이 뿌린 성스러운 피는 수많은 천주교 신앙인의 중심지로 태어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손암과 다산의 본가와 외가 모두 조선 후기 천주교 도입, 전파, 박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형제의 가문은 정치적으로 남인 계열에 속하였기 때문에 정조 이후 노론 계열로부터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조 대에는 남인들이 국왕의 비호 아래 일정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천주교 또한 강력한 탄압에서 벗어났지만 정조 사후 남인 계열의 사대부와 천주교는 타도와 배척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형제의 집안에도 먹구름이 낄 것이라는 예상은 불을 보듯 했다.


형제의 큰형 약현의 딸과 결혼한 이승훈은 순교하고 가솔들은 모두 노비로 강등되었다. 형제의 누님은 황사영과 결혼하였는데 백서 사건으로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다. 손암의 동생이자 다산의 바로 위 형인 약종은 형제 가운데 신앙이 가장 단단하고 교리에도 밝았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의금부 포졸들이 약종을 체포하러 남양주 집에 들이닥치는데 약종이 길거리에서 포졸들을 만났다. 약종은 포졸들에게 자기를 체포하러 가느냐고 묻고 순순히 포박당했다. 자기의 목숨을 천주에게 내맡긴 신앙인이었다. 순교 장면도 남달랐다. 약종은 목을 치는 백정에게 머리를 하늘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죽는 순간에도 천주를 보면서 웃는 모습이었다. 손암과 다산도 체포를 피할 수 없었다. 둘은 천주를 받아들였지만 배교한 전력이 있었다. 노론 정치세력은 약전과 약용의 배교 사실을 알면서도 물고 늘어졌다. 이들을 보호할 국왕 정조도 없지 않은가. 형제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약종이었다. 국문 과정에서 약종은 형제가 배교하였던 증빙 편지를 제시하였다. 노론도 형제를 사형시킬 만한 결정적 증거도 없었다. 둘은 목숨을 건졌고 손암은 전라도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손암과 다산이 유배를 살던 중 매형 황사형의 백서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형제는 다시 국문을 당하였는데 또 다시 결정적 증거 부족으로 참형을 면하고 다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번에는 손암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형제는 1801년 11월 5일 감옥에서 나와 11월 21일 나주읍에서 북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한 밤남정(밤나무 정자 거리 율정(栗亭)의 약칭)이라는 삼거리 주막촌에 도착한다. 밤남정은 나주 금성산 바로 아래에 있는데 당시에는 교통 요지로 이곳에서 강진쪽과 목포쪽으로 갈라졌다. 다음 날이면 손암은 뱃길을 이용하여 흑산도로 가고, 다산은 영산강을 건너고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가야 한다. 약전 형님과의 이별을 노래한 동생 약용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율정별(栗亭別)'의 일부를 인용한다.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중략)

내가 장기 고을 있을 때에는

낮이나 밤이나 강진 바라보며 

날개 죽지 활짝 펴고 푸른 바다 뛰어넘어

바다 가운데서 저 형님 보려 했는데

(중략)

또 마치 바보스러운 아이가

망령되이 무지개 붙잡으려 하는 셈이니

서쪽 언덕 바로 앞에

아침 무지개 분명히 보이나 

애가 쫓아가면 무지개는 더욱 멀어져 

또 저 서쪽 언덕 쫓아가도 다시 서쪽이라오(박석무, 2019: 375-376 재인용).


형은 동생의 시에 대해 이렇게 답장을 보낸다.


남쪽으로 오던 길 아직도 사랑하는 것은

율정의 갈래길로 이어지기 때문이네

갈기 늘어진 말 함께 타고 열흘 올 때에

우리는 참으로 한송이 꽃이었지...



우애가 남다른 형제가 이별을 앞두고 눈만 멀똥멀똥 뜨고 바라보면서 감정을 자제하지만 결국엔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별을 재촉하는 샛별은 왜 그렇게도 일찍 나타나는지... 동생은 형을 밤낮으로 그리워했으며, 그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언덕에 무지개가 헛보일정도였을까 싶다. 다산의 문학적 감수성이 탁월하다. 다산에게 형 손암은 넓은 국량, 깊은 학문, 밝은 식견을 가진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었다(박석무, 2019: 381). 다산에게 형님 약전은 형제이면서 지우(知友)이며 스승이었다. 유배 중에도 다산은 형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지성인이었던 다산은 자신의 저술을 형에게 보내 감수를 받은 다음에 책끈을 묶었다. 다산이 조선 후기 최고의 지식인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것은 손암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자산어보(玆山魚譜) 역시 손암과 다산의 제자들이 협업으로 완성한 걸작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 후기 유배형을 살던 형제가 만든 휴먼드라마다.  


다산은 형이 보고 싶어 견디기 어려울 때는 강진 보은산('우이산'으로도 불림) 올라가 흑산도의 우이도를 바라보며 형님 생각에 잠겼다. 형은 혹시나 동생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흑산도까지 오는 것을 걱정하여 육지와 가까운 우이도로 옮겨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형제에게 율정에서 생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형제는 유배 중에 서로의 마음을 편지로 달랜다. 강진에서 귀양살이 7년째이던 때에 흑산도에서 형님의 편지가 왔다. 동생은 형에게 시를 보냈다. '손암에게 받들어 올리다(奉簡巽菴)'라는 시의 일부를 옮겨본다.


살아서는 미워할 밤남정 주막

문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갈렸네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지는 꽃잎에서 흩날려 버렸네...(박석무, 2019: 378).


가슴 시린 아름다운 형제애다. 한 뿌리에서 자라나 꽃을 피운 '형제꽃'이 세찬 바람에 낙화(落花)되어 뿔뿔이 흩날렸다고 한다. 다산은 1818년 8월 해배(解配)되어 남양주로 돌아가는 길에 율정점에 이르러 '회율정별리(懷栗亭別離)'라는 시를 남긴다. 18년 전 형님 약전과 율정점에서 이별한 뒤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던 형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한을 노래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 말하지 말게나

밤남정에서 헤어진 뒤 영원히 보지 못했지

편지로 학문 주고받았지만 그리움 사그라지지 않아

무심한 하늘이여, 어찌 이리 심한 한을 주시었나이까(홍찬선, 2015).


다산은 너무나 사랑했고 존경했던 형 손암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된 것을 하늘의 무심함 탓으로 돌린다. 형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은 한(恨)의 응어리로 남아 가슴을 후벼 판다. 다산 정약용과 손암 정약전이 남긴 절절한 형제애를 보면서 '사람의 관계는 하늘이 내리고,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된다. 다산과 손암 두 형제가 남긴 아름다운 우정과 진정어린 사랑은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유산이 될 것이다. 다산과 손암의 형제애를 본(本)으로 삼아 저자 역시 형제 간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동여매야겠다.


한 가지만 덧붙이고자 한다. 다산과 손암은 저자의 고향 화순과도 인연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형제는 1777년(정조 1년) 화순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갔다. 형제는 화순읍에서 북쪽으로 2km쯤 떨어져 있는 사찰 동림사에서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청운의 꿈을 키웠다. 다산은 이곳에서 산문 '동림사독서기'를 썼고, 그 흔적이 화순 만연사 입구에  세워진 '다산 정약용 선생 동림사 독서기비'가 기념비로 남아 있다(동림사와 만연사는 곁에 있었는데 동림사는 오래 전에 폐사되었다). 저자는 다산과 손암을 평생학습자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형제는 언제 어디서나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배움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내 고향에서 소년기의 한 때를 보낸 형제를 생각하면 애틋함과 친밀함이 더 커지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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