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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21. 2021

인연이 역사를 만든다

② 고려 원종과 몽골 쿠빌라이 칸의 조우

칭기스 칸(재위 1206-1227)이 세운 몽골제국은 중국, 아시아, 러시아, 유럽을 정복하면서 세계사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점령했다. 현대의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에 이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당시 몽골 부족 전체 인구가 약 100만 명이었고, 군대는 10만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정도 규모의 군대로 시베리아부터 인도와 헝가리 그리고 발칸 제국까지 뻗어나갔다. 몽골군은 25년의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웨더포드 2016, 14-15).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인크레더블한 이야기다.



몽골에서는 대체로 친족 관계에 바탕을 둔 무리를 칸(汗)이라고 부르는 우두머리가 이끌었다. 칭기스 칸(Chinggis Khan)이란 칭호는 서구에는 페르시아 철자법에 따라 겡기스 칸(Genghis Kha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몽골어에서 친(chin)은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chino)와 가까웠다. 실제 몽골족은 자신들이 늑대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웨더포드 2016, 122) .


몽골이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본 지역은 유럽이다. 몽골(페르시아어로는 '무굴')은 러시아를 정복하고 폴란드를 접수한 뒤 헝가리를 침공하여 부다와 페스트를 점령했지만, 1241년 12월 대칸 우구데이(1229-1241)가 죽자 1242년 초 러시아로 철군했다. 신임 대칸을 선출하는 회의, 즉 쿠빌타이를 위해 몽골 본토에서 모여야 했기 때문이다. 대칸 우구데이의 죽음이 유럽을 살린 셈이었다(로사비 2015, 34-35). 대칸이 죽지 않았다면 유럽의 역사는 오늘날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역사에는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끼어들 가능성이 열려있다.


징기스 칸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후계자 선출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칙을 정하지 않았다. 쿠빌타이에서 징기스 칸의 후손 중에 적임자를 선출한다. 쿠빌타이는 몽골 부족의 전통적인 회의로 각각의 가족, 가문, 씨족이 참여하여 투표를 한다. 그래서 몽골제국 대칸이 선출되기까지는 2년에서 5년까지 공백이 생긴다. 이 공백기에 목숨을 건 세력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몽골군은 대칸이 죽으면 휘하 장수들이 점령지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정복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곤 하였다. 4대 대칸 뭉케(재위 1251-1259)가 죽었을 때 몽골군은 중동과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있었는데 대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력 부대를 몽골로 철수시켰다.


뭉케 대칸이 사망하면서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징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등장한다. 뭉케는 세 명의 아우를 두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 쿠빌라이와 셋째 아우 아릭부케가 대칸이 되길 원했다. 둘째 아우 홀레구는 서아시아에 자신의 영지를 갖고 있어 칸위 경쟁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형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는 적대적으로 세력을 불리는 데 혈안이 되었으며 급기야는 형제 간에 무력 충돌까지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동생 아릭부케가 병사하면서 쿠빌라이가 대칸(1260-1294)으로 선출되었고 중국의 원나라를 건설하였다.


쿠빌라이(忽必烈)와 고려 태자 왕전(王倎)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1259년 6월 9일 왕전은 뭉케 대칸을 만나 강화를 요청하기 위해 연경(오늘날 북경)으로 가는 길이었다. 몽골은 고려를 오랫동안 침략(1231-1257)하였지만, 고려 왕실이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대몽항쟁을 펼치게 된다. 고려는 몽골에 투항하지 않고 저항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 몽골에게 고려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몽골이 고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압박하자 고려 지도층은 본토를 내어주고 강화도로 천도하는 '벼랑끝 외교'로 버텼다. 그러나 몽골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고려는 결국 고립/항전 노선을 포기하고 몽골과의 강화 협상에 나섰다(유성운 2018).

<쿠빌라이 칸>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도 태도를 바꿨다. 1256년에는 국왕 대신 태자의 입조를 요구해왔다. 때마침 항전을 주도한 최씨 무신정권이 정변으로 몰락하면서 타협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듬해 태자의 입조를 결정했다. 태자 일행은 중국에 도착했을 때 남송을 공략 중이던 뭉케 대칸(몽골의 헌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태자 일행은 아릭부케가 북방 지역을 군사로 막으니 인심이 걱정하고 의심하여 어디를 따를지 몰랐다(고려사절요 권18). 태자와 일행은 몽골 황실이 후계자 선출을 놓고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계승 분쟁이 벌이고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태자와 일행은 상당 기간 아릭부케가 있는 북쪽으로 가야 할지, 쿠빌라이가 있는 남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태자는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남송 공격을 중단하고 몽골 고원으로 돌아가고 있던 쿠빌라이와 마주쳤다. 이것이 의도된 판단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든 우연한 만남이든, 태자 왕전과 쿠빌라이의 조우가 몰고 온 파급효과는 이후 고려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우리 역사넷, 원종 참조).


<고려사절요>의 원종(재위 1259-1274)편에서는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때 황제의 아우 쿠빌라이가 강남(江南)에서 군대의 위세를 보이다가 군사를 돌려 북상하였다. 태자가 폐물을 받들어 길가에서 배알하니, 쿠빌라이가 놀라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고려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다. 당(唐) 태종이 몸소 정벌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는데, 지금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라고 하였다. 쿠빌라이의 신료들은 "고려는 비록 소국이지만 산과 바다의 험준함에 의지하니, 나라에서 20여 년간 군사를 동원하였어도 아직 신하가 되지 않았습니다. (중략) 지금 듣기로 그의 아비(고종 재위: 1213-1259)가 이미 죽었다 하니, 실로 왕전을 왕으로 세워 본국으로 돌려보내면, 세자는 반드시 은덕에 감격하여, 신하의 직분을 닦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는 한 명의 병졸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고려 태자가 자발적으로 쿠빌라이를 찾아온 것(태자가 고려로 돌아가는 중에 우연히 만난이 이루어진 것, 즉 조우로도 볼 수 있음)에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멀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


대체나  태종조차도 정복을 포기했던 그런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찾아와 복종 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쿠빌라이로서는 자신의 정통성과 위세를 과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싶다. 태자 왕전의 도박(북쪽으로 가지 않고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린 것)은 쿠빌라이가 황위 계승 싸움에서 최종 승리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왕전이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린 것은 독일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말처럼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간” 결단이었다(유성운 2018).


고려 태자와 쿠빌라이(원나라 세조)의 인연은 고려에게는 오랜 전쟁에서 국가를 재정비할 기회가 갖게 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도 했지만, 원의 본격적인 간섭을 받게 되면서 자주성의 상실과 굴욕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우선 태자 왕전은 쿠빌라이의 도움으로 고려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고려 국왕은 대대로 몽골 황실과 혼인을 맺으며 몽골 왕실의 사위, 즉 부마에 봉해지고 몽골 칸의 계승 분쟁에도 깊숙하게 관여하기도 한다. 쿠빌라이 칸의 손자가 고려 왕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면서 고려는 몽골이 구축한 세계 질서 안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또한 고려는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약속을 받아냈다. 불개토풍의 약속은 이후 한 세기 동안 지속될 몽골과 고려의 양국관계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고려는 몽골에 복속하게 되지만, 쿠빌라이와의 인간적인 인연을 계기로 여섯 가지의 조건을 내걸었고 쿠빌라이도 이 조건들을 받아들였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외교의 시작은 인적 네트워크에 달려 있다. 아래는 여섯 가지 조건이다.


첫째,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다.

둘째, 신은 오직 원나라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셋째, 개경 환도는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넷째,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다섯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여섯째, 몽고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몽골은 다루가치를 고려에 파견해 내정에 개입하려 했고, 이 기간 고려의 왕들은 충성을 의미하는 '충(忠)'자를 돌림자로 쓰게 되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고려 몽골의 쿠빌라이가 약속한 '불개토풍'을 외교관계의 원칙으로 삼고 사대외교를 했다면,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특히 임진란 후에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상국으로 모시고 대중화(大中華) 명나라를 계승한 소중화(小中華)를 자임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만주족의 청이 명나라를 무너뜨린 후에 조선 사대부의 소중화 의식과 신념은 더욱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다시 고려로 돌아가자. 사실 무신들이 고려 왕실을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 태자와 쿠빌라이의 인간적인 관계만으로 양국의 외교 문제가 정리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1259년 고려의 고종이 죽자 실권자 김준은 태자 왕전이 몽골에 있다는 이유로 고종의 둘째 아들 왕창(王)을 왕위에 앉히려 한 적이 있었다. 무신들은 몽골에 대해 강경책을 취했고, 개경 환도를 서두르지 않았다. 급기야는 무신들과 왕실의 갈등으로 한때 원종이 무신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다(정성희 2000, 364-367).


고려가 독자적인 제사와 관제를 온전하게 유지한 것도 원나라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려사>(권33, 세가 권제33)에서 원의 무종이 고려 충선왕에게 내린 제서(制書)에서 말한 내용 중 일부를 옮겨본다.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과 사직이 있고 왕노릇하는 것은 삼한(고려)뿐이다. 조상 때부터 신하가 된 것이 거의 100년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일구어놓은 것을 아들이 다시 성취하니, 나와는 장인과 사위라 할 수 있으며, 훈척으로 일가가 된 것이니 마땅히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고려는 1335년 몽골에서 공녀(貢女)를 요구해왔을 때,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와 고려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부각하면서 요구를 거절했다. <고려사절요> (권25)의 기록에 따르면, "세조 황제께서 공주를 하가(下嫁)시키시고 인하여 조서를 하사하시어 권면하고 타이르시며 말씀하시기를, ‘의관과 국가 의식은 선대의 풍속을 무너뜨리지 말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 풍속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지금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민과 사직이 있는 곳은 오직 삼한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설득시켰다. 고려는 몽골의 지나친 요구에 대해서는 이렇듯 쿠빌라이의 약속과 인척관계를 상기시키면서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 전략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고려가 몽골과의 왕실인척의 관계를 맺은 나라라고 하지만, 몽골인에게 고려는 자국의 ‘동번(東藩)’, 즉 동쪽 울타리에 있는 속국으로 인식되었다. 충렬왕 이후 원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원나라의 부마가 되었으므로, 몽골인의 처지에서 보면 고려의 영토와 인민은 원나라의 부마가 보유하고 있는 투하령이 되는 셈이다. 결국 몽골인은 고려를 독자성을 지닌 제국의 외연적 존재로 파악하면서도 한편으로 원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편입된 투하로 보는 이중적 고려관을 가지고 있었다(우리 역사넷, 이정란 참조). 역사는 사람의 역사이고, 그 역사는 사람 사이의 인연이 만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만, 고려 태자와 쿠빌라이의 조우는 고려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유성운. (2018). <중앙일보>. <[유성운의 역사 정치] 고립 풀고 평화를...고려 운명이 바뀐 날>. 6월 3일.

김호동. (2011).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파주: 돌베개.

로사비, 모리스. (2015).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 강창훈 옮김. 사회평론.

웨더포드, 잭. (2016). <징키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정영목 옮김. 파주: 사계절.

<고려사> 권33, 세가 권제33, 충선왕 2년(1310년) 7월 을미.

<고려사절요> 권18, 원종 1년(1260년) 3월.

<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후) 4년(1335년) 윤 12월.

원종. <우리 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203300&code=kc_age_20

이정란. <우리 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30_0050_0020_0010_0010&whereS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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