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전쟁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by 염철현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종교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체계로서 그 대상ㆍ교리ㆍ행사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애니미즘ㆍ토테미즘ㆍ물신 숭배 따위의 초기적 신앙 형태를 비롯하여 샤머니즘이나 다신교ㆍ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 따위의 세계 종교에 이르기까지 비제도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이 있다"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이처럼 종교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붙잡고 의지하는 신비하고 불가해한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해온 종교가 개인간, 부족간, 국가간에 갈등과 대립을 빚고 전쟁으로 치닫는 경우를 본다. 이른바 종교전쟁이다. 종교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전쟁의 상당 부분이 종교적 이유가 차지한다. 특정 종교가 세속의 정치 또는 경제 권력과 손을 잡고 어느 종교 또는 어느 신도를 선이나 악으로 지목하는 순간, 영혼의 구제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사생결단의 격정적인 감정으로 치닫고 되고 나와 다른 타자를 타도와 배제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의 종교 지형을 바꿔놓았지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신교도) 간 종교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루터조차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에서는 가톨릭이라는 단일종교가 유럽과 유럽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었다면, 종교개혁 이후에는 종교 선택의 자유를 놓고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빚었다. 유럽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1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전쟁은 정치가 종교를 사유화 혹은 도구화하거나 반대로 종교가 정치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몇 가지 주요 사례를 들어본다.


유럽 국가 중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를 꼽자면 단연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가톨릭의 열렬한 옹호국으로 스페인이 지배하는 모든 영토 내 사람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신대륙 발견을 위해 출항하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하느님이 선택한 종이라는 자부심이 팽배했다. 지나친 강요는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1568년 스페인의 영토였던 네덜란드의 신교도가 반란을 일으켜 저항한 결과, 1581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세웠다.


프랑스에서는 1562년 왕권 쟁탈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 종교적 갈등과 맞물려 위그노 전쟁(1562-1593)이 일어났다. 종교적 내란이다. 위그노는 프랑스에서 신교도를 폄하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여 내란을 종식시켰다. 당시 정치적, 종교적 상황으로 볼 때 앙리 4세는 매우 이례적인 군왕이었고, 용기 있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는 농민들이 주일마다 닭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풍족하게 살게 해주는 신이라면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낭트칙령은 앙리의 손자인 루이 14세에 의해 철회되었다. 1685년의 퐁텐블로 칙령이다. 종교적 관용이 정치적 목적이나 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한다.


신성로마제국(복합체로 구성된 영토로서 그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왕국은 독일이었고, 그 외 보헤미아왕국, 부르군트왕국, 이탈리아왕국 등이 있었다)에서는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독일은 루터의 종교개혁 발상지로 종교개혁을 앞서 수용하면서 구성원 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종교전쟁의 불씨를 품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155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여 '제후의 신앙에 따라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의 신앙이 결정된다'라고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루터파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30년 전쟁은 아우크스부르크 선언이 선언문대로 지켜지지 않은 결과로 시작된 전쟁이었는데 전쟁이 지속되면서 가톨릭 연합 대 반가톨릭 연합의 국제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주축으로 하는 가톨릭 연합과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튀르크 등 반가톨릭 연합국이 충돌했다. 독일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개입하고 국제 전쟁이 된 이유는 이렇다. 신도교가 불리하면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신교도 국가들이 신교도를 지원하며 가톨릭 측을 공격하였고, 가톨릭 측이 불리하면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등 가톨릭 국가들이 신교도를 공격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스페인 못지않은 열렬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왜 반가톨릭편에 가담했는가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종교가 얼마나 정치적, 세속적으로 이용되었는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전장터가 된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 낙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은 신교도의 승리로 끝났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독일에서는 루터파 외에 캘빈파를 인정하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은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갈등의 골을 확인케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교파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인정하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나의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가 소중하면 타자의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 역시 소중하다는 각성이 일어났다. 나의 신념이나 관점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즉, 오늘날 다문화이론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의 이해'가 이루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유럽의 정치적 세력 판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에서 초강대국의 위세를 떨치고 가톨릭 옹호국으로서 유럽 제국에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끼쳤던 스페인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로마 교황청도 영향력이 떨어졌다.


<30년 전쟁 당시 유럽의 종교적 지형>


종교의 뿌리가 같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전쟁이 종교 내전이라면,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전쟁은 국가 간의 종교 전쟁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11세기 말-13세기 말)을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벌어진 대표적인 종교전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무려 2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초기 목적은 기독교 발상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서였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목적이 변질되어 실패하였고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한때 이슬람교는 이베리아 반도, 즉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스페인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레콘키스타라는 국토회복운동을 전개하여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레콘키스타의 성공은 스페인이 유럽에서 가톨릭 옹호국으로서 뿐 아니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치의 성공은 외치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스페인 왕실이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프로젝트를 후원한 것 역시 내치의 성공에서 비롯되었다.


168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전투야말로 유럽에서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 다툼의 분기점이 되었다. 1529년 오스만 투르크는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애칭은 '황금사과')를 점령하기 위해 포위공격을 했다가 실패했는데, 150여 년만에 다시 비엔나를 공격한 것이다. 1683년 7월 14일 오스만 투르크의 무스타파 파샤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도착했다. 무스타파는 장기전을 펼 계획으로 성채를 포위했다. 오스만 투르크군은 비엔나를 포위해 군대와 시민들을 굶겨죽일 계획이었다. 오스만 투르크군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을 때처럼 포격으로 성채를 집중 공격하는 한편, 성벽 아래에 갱도를 파 들어가기도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 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드 1세는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 국가에 구원을 요청했다. 가톨릭 국가 진영에서도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비엔나마저 이슬람에 함락되면 유럽 전체가 이슬람에 짓밟힐 것을 우려했다. 이슬람이 황금사과를 먹게 되면 로마가 무너지고 성스러운 교회가 무너지는 도미노를 걱정했다. 로마 교황청이 전쟁 자금을 대겠다고 나섰다. 이슬람에 대항하는 범가톨릭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오스만 투르크군은 가톨릭 연합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비엔나를 함락하기 위해 총공세를 퍼부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전투의 결과는 오스만 투르크의 패배로 끝났고, 가톨릭 연합군은 이슬람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냈다.


오스만 투르크는 터키로 이름을 바꿔 1923년 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유럽 편입 정책을 추진해왔다. 유럽은 연합국가(EU)의 성격을 띠고 있다. 터키 역시 EU 가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도 회원국이 아니다. 오스트리아가 결사 반대하기 때문이다. EU 회원국이 되기 위해서는 회원국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하다. 오스트리아는 터키가 유럽이 아니라는 이유를 제기하고 있지만, 16, 17세기 오스만 투르크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두 차례 포위 공격한 사건 때문일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수세기의 세월이 지나도록 오스만 투르크가 저지른 침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친 원한은 대대손손 전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것을 구원(舊怨)이라고 하던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포위한 오스만 투르크 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오스만 투르크군은 비엔나 전투에서 성벽 아래 갱도를 파고 화약을 폭파시켰는데, 어느 제빵사가 지하실에 밀가루를 가지러 갔다가 폭파음을 듣고 수비군에 알려 오스만의 갱도 건설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제빵사는 오스만군을 축출한 영광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의 상징인 초승달(crescent) 모양의 빵을 만들었다. 이 빵이 크루와상(croissant)의 유래라고 한다. 프랑스로 시집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 앙투아네트도 비엔나에서 먹던 빵이 생각나 프랑스로 가져오게 해 크루와상이 파리에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초승달을 닮은 크루와상>


인류 역사는 종교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으로서는 종교의 힘에 의지해 일상생활의 번뇌와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정신문화요 상징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종교가 세속적, 정치적 볼모가 되어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치닫게 되면 극단적인 차별과 배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떤 종교는 선이 되고, 어떤 종교는 악이 되고 만다. 종교가 선과 악의 대결을 위한 무대를 제공한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종교야말로 아마겟돈에 다름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난 종교전쟁의 양상이 이를 방증한다. 무엇을 위한 종교이고,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라고 묻고 싶다. 새무얼 헌팅턴이 인류 문명 충돌의 발단을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진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인류는 종교가 지닌 근원적인 정체성, 즉 사랑과 관용 그리고 배려와 존중이라는 덕목을 실천할 때 비로소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인철. (2003).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출판부.

염철현. (2021). <현대인의 인문학>. 고려대출판문화원.

프리델, 에곤. (2015). <근대문화사 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흑사병에서 30년 전쟁까지>. 변상출 옮김. 한국문화사.

헌팅턴, 새뮤얼. (1997). <문명의 충돌>. 이희재 옮김. 파주: 김영사.

영화 <비엔나 전투 1683>(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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