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피천득의 시 <인연>에 나오는 시의 구절이다. 인연(因緣)이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이 서로 맺어지는 관계를 말한다. 인간만사가 인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조선왕 선조(재위 1567-1608)와 서산대사[1520-1604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법명은 휴정(休靜)]와의 인연에 대해 쓰려다 보니 인간사가 인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숭유억불정책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왕이 불교 고승과의 인연을 어떻게 맺었단 말인가? 조선 개국 초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와의 관계가 또 있단 말인가. 도대체 선조와 서산대사는 어떤 인연을 맺었고 이 인연은 어떻게 이어졌더란 말인가?
선조수정실록 24권에 따르면, '휴정이 묘향산에서 수행 중에 정여립 모반 사건(1589)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선조가 휴정의 석방을 지시하면서 묵죽시를 하사하여 위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여립 모반 사건, 즉 기축옥사의 요지는 이렇다. 정여립(1546-1589)은 전주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료로 승승장구하다 당파(서인)를 바꿔 동인 편에 서면서 선조의 미움을 받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낙향한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여 기인, 모사들과 교류하면서 무술을 연마하였으며, 임진란 4년 전에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을 소탕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왕조시대에는 용인되기 어려운 급진적인 대동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른바 "천하는 공공의 물건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닐 것인가(天下公物 何事非君)"라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이 말 자체만해도 역모로 단정 짓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모반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의견들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이 사건으로 조선의 지식인, 특히 호남의 지식인들이 많이 죽었다. 당시 지식인 천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 정여립을 재평가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향토사학자 신정일은 '정여립은 영국의 공화주의 혁명가 올리버 크롬웰(1599-1658)보다 60년 앞선 한국 최초의 공화주의자로서 엄혹한 왕조 시절에 시대를 앞선 사상을 주창한 혁명가'라고 주장한다. 또한 '정여립의 대동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됐다'라고 설명한다(박임근 2018).
정여립 모반 사건은 승려들이 많이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불교계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체포된 승려들 중 무업(無業)은 고문에 못 이겨 뜻밖에도 휴정이 모반에 가담한 것처럼 진술하였다. 무업은 휴정의 <등향로봉(登香爐峰)>을 역모에 연루된 증거로 제시하자 포도청에서는 휴정을 체포하여 고문을 받게 되었다. <등향로봉>은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라/ 맑고 그윽한 달빛 베고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은 묘음(妙音)을 연주하네." 임금이 사는 도성(都城)을 개미가 사는 굴에 비유했으니 언뜻 보기에는 역모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국가원수 모독죄는 왕조시대에는 역모죄에 가깝다.
역모 사건에 고승이 연루되었다고 하니 선조에게도 보고가 되었으리라. 선조는 휴정이 쓴 시집이라든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열람한 후 그의 뛰어난 문장과 충정에 감탄하고 즉각 석방 명령을 내렸다. 선조는 휴정에게 대나무 그림을 곁들여 묵죽시(墨竹詩)를 내려 고승의 무고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을 비췄다.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뿌리도 땅에서 나오지 않았네./ 달이 비추어도 그림자가 보이질 않고/ 바람이 불어도 소리가 들리질 않네(葉自毫端出 根非地面生 月來無見影 風動不聞聲)" 그림에 묘사된 대나무의 잎과 뿌리 그리고 달과 바람은 모두 실제가 아닌 그림일 뿐이라는 뜻으로 서산대사의 실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최정준 2018). 선조가 휴정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선조와 서산대사 휴정은 속세에서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와 속세를 벗어난 고승과의 인연은 누란에 빠져 나라를 구하는 데에서는 한 마음이다. 임진란(1592)으로 나라가 위기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선조는 서산대사와의 인연을 떠올리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국가 차원에서 승통(僧統)을 설치하고 승군(僧軍)을 모집하게 되는데 휴정에게 팔도 도총섭(八道都總攝)의 직책을 주고 책임을 지게 했다. 이때 휴정의 나이는 73세였다. 휴정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관동의 유정(惟政)과 호남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의 승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또 실록에서는 승군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승군은 제대로 접전은 하지 못했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여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을 의지하였다."(선조수정실록 26권).
조선은 유학자들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유학자들이 승려들을 곱게 볼리 없었을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서 승군의 도움을 받게 되었지만, 평시에 사찰의 승려들은 성곽 부역에 동원되거나 종이를 제조하는 등 위험하고 힘든 노역에 종사하는 처지였다. 승군이 조직되고 몇 개월 후 사헌부에서는 선조에게 이렇게 아뢴다. "국가가 어려움이 많아 적을 토벌하는 것이 시급한지라, (중략) 승려인 휴정에게도 병권을 맡기었는데, 조정의 수치가 극심합니다. 휴정은 적을 초토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방자한 마음만을 품어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앞뒤에서 호위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타고 궁문 밖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신하들을 만나도 거만스레 벼슬아치나 재상의 체통을 보입니다. 조금도 중다운 태도가 없으니 추고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명하시어 후일을 징계하소서"(선조실록 34권). 신분계급의 나라, 조선에서는 나라의 운명이 오늘내일하는 과정에서도 뭐가 중한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휴정을 따르는 승려들을 그를 호위하는 추종자로 비유하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다가 나라를 구하려는 충의로 심산유곡에서 내려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전쟁에 참전한 고승에게 재상의 체통 운운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조는 적어도 임진란 이후 휴정과의 인간적인 인연을 살려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는데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군의 노고에 대해서도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근래 승려들이 적을 참획한 것은 모두 휴정의 지휘에 의한 것이니 그에 비단 1필을 하사하고, 그의 제자에게는 공이 있는 사람의 아들과 사위, 동생과 조카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예에 따라 군직을 제수하기도 하고 면역시키기도 하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선조실록 38권).
선조는 숭유억불의 나라에서 임금을 하면서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 그래서인지 실록에는 선조가 불교계와의 밀착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중략) 각도 승려의 수가 상당히 많지만 세상을 등지고 구름처럼 떠도는 무리라서 국가에서 사역시킬 수 없게 되어 있으니, 그들을 사역시킬 수 없을 바에야 한 장의 종이를 주어 적의 수급 하나라도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중략) 의병에게 빈 관직을 주어 조정의 법도를 문란케 하는 것과는 다르고 또 재물을 소비하며 군사를 먹어야 할 걱정도 없을 것이다. 이는 이단을 존숭하여 선과(禪科)를 회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적을 초토하려는 술책일 뿐이다. (중략) 이를 가지고서 내가 이단을 숭배한다 하면, 듣는 자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선조실록 39권).
선조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후하지 않다. 동서 붕당을 자초하고 이를 정치에 이용한 왕, 전쟁이 예견되었음에도 준비하지 못한 채 나라를 파탄내게 한 왕 등 부정적인 평가가 대세다. 그러나 선조가 숭유억불의 국시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와의 인연을 살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데 노력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라는 시인의 시구절을 인용한다면, 선조 또한 현명한 구석이 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씨앗은 선조와 서산대사의 인연, 그리고 그 인연을 발판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뿌려지고 발아된 것으로 봄직하다. 이러니 만남에 대한 책임은 하늘에 있고,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김우영. (2021). <전주의 인물명 도로, 정여립로 이야기>. <전북일보>. 8월 22일.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심재우, 한형주, 임민혁, 신명호, 박용만, 이순구. (2011).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파주: 돌베개.
이병재. (2019). <조선을 뒤흔든 역모사건, 그 진실은?>. <전라일보>. 1월 21일.
최정준. (2018).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월래무영: 달이 비추어도 그림자가 없다>. 경인일보. 12월 6일.
박임근. (2018). <정여립은 한국 최초의 공화주의자입니다>. <한겨레>.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