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리더십

올리버 P. 스미스 장군

by 염철현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다. 동족 간의 전쟁은 오죽하겠는가. 6.25 전쟁(한국전쟁)이 그렇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그 과정에서 숱한 영웅담이 쏟아진다. 한국전쟁에서 우뚝 솟은 인물은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지만, 역사의 평가는 노회한 정치군인에게 경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전쟁의 총사령관 맥아더는 전장터인 한반도에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 중 단 하룻 밤도 한국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일본의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동경의 호텔에서 보고받고 지시했다. 장수가 전장에서 전황을 파악하거나 부하들의 형편을 살피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다. 전장과 유리된 맥아더의 실수는 예고되어 있었다. 맥아더의 오판과 실수를 최소화 시킨 것은 최전선에서 싸운 그의 부하들이었다. 맥아더에게 숱한 참모와 예하 부대의 지휘관들이 있었지만 올리버 P. 스미스 장군에 주목한다.


스미스 장군(1893-1977)은 한국전쟁 당시 미해병대 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그는 1950년 함경북도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6일-12월 13일)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말려 악전고투 끝에 사단 병력을 성공적으로 철수시킨 장본인이다. 군사사학자 S. L. A. 마셜은 "스미스 장군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인정받지 못한 장군 중 한 명이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역사장 가장 괄목할 만한 사단급의 위업이다"(사이즈 2021, 406)라고 회고했다. 스미스 장군이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는 깊은 감명과 함께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위기에 봉착하여 빛이 나는 것이다. 위기 관리 리더십이다. 마치 품속에서 제갈공명의 비단주머니를 필요할 때 꺼내보이는 것이다.


한국 전쟁을 총지휘한 맥아더(1880-1964) 사령관의 리더십을 되새김질해보자. 그가 일생 누볐던 전장이 아니라 한국전쟁에 국한해서다. 맥아더에 대한 통념과 신화를 파혜치는 것이다.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을 성공시켜 그의 명성을 입증했다.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인천, 그것도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넓어 상륙작전지로서 최악으로 평가받은 지역에 보란듯이 상륙하였다. 1951년 4월 맥아더 총사령관이 해임되고 그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장군은 성공확률이 5천분의 1의 모험이라고 일갈했던 적이 있었다. 맥아더가 즐겨 사용하는 비유처럼 북한군은 망치와 모루 사이에 낀 형국이었다. 그의 뚝심과 경륜이 돋보인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전황과 전세에 대해 과도한 자신감을 가졌다. 전쟁이 자신의 생각대로 전개될 줄 알았다. 북한군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공산주의를 한반도에서 사라지게 할 기회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국지전의 승리에 도취한 맥아더의 과잉 자만심과 허영심은 그의 리더십을 아집, 오만, 독선으로 치닫게 했다. 실제 맥아더는 상륙작전 성공 후 서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 경례조차 하지 않았다. 최고군사령관인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거절하고 동경에서 가까운 웨이크 섬에서 만났다. 대통령도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싶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로 쉽게 의사결정을 하지 못했다.


남침을 주도한 북한과 소련, 중공은 연리지처럼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한쪽이 어려움에 처하면 자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할 것이 뻔했다. 맥아더는 간단한 국제역학관계조차 무시했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황제처럼 떠받드는 아첨꾼의 참모들로 꾸려졌다(사이즈 2021). 한국전쟁 발발 후 1951년 4월까지 한국전쟁은 사실상 맥아더의 전쟁이었고, 맥아더와 주변 참모들의 잘못된 판단과 독선은 장병들을 불필요한 위험 속에 빠뜨렸고 장기전이 되게 했다(이상돈 2014, 18 재인용).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리더십은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큰 틀에서 전세를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전쟁은 맥아더 개인이 좌지우지하는 전쟁이었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북진통일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는 여기에 중국 본토 회복이라는 목적을 추가했다. 마오쩌뚱에게 빼앗겨 공산화된 중국을 예전의 중국으로 되돌려놓는다는 것이다. 원자폭탄을 투하해서라도...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군사 전략가들은 말한다. 만약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조기에 인정하고, 이승만이 북진통일이라는 허황된 목표를 내걸지 않았더라면 평양과 원산, 함흥을 잇는 새로운 국경선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또 전쟁을 오래 끌지도 않았을 것이고 장병들의 목숨을 불필요한 위험 속에 던져 넣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정치 군인이었다. 그는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했다. 맥아더가 얼마나 정치적이었는가는 한국전쟁 중 그의 언론플레이로 알 수 있다. 언론에 전황과 다음 목표를 미리 흘려 북한군과 중공군에게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었다. 전쟁 기밀이 맥아더에게는 개인 치적을 위한 홍보용이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때의 나이가 70세였는데 노욕이 노추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야욕과의 전쟁에서는 지고 있었다. 전쟁을 정치화한 맥아더와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은 이해관계가 맞았다. 전쟁이 정치적 이해관계로 넘어가는 순간 비극적인 전쟁이 훨씬 더 비극적이 되고 만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대결에 그치지 않았다. 자유민주진영과 공산진영과의 싸움, 즉 이데올로기의 대리전 양상이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최대 관건은 중공의 참전 여부였다. 여기서 맥아더 사령관은 결정적인 오판을 하게 된다. 중공의 참전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거나 관련 정보를 의도적으로 철저히 무시했다. 중공은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할 수 없다는 확증편향에 빠진다. 혹시라도 중공이 만주에 전력을 공급하는 북한 내 수력발전소의 수문을 지키려고 참전할 수 있겠지만 맥아더와 참모들은 이 마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사이즈 2021, 127).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최대 걱정도 중공의 개입이었다. "중국인의 개입 위험은 없나요?"라는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는 이렇게 답변한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전쟁에 감히 개입하지 못할 것이고 설사 그들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더라도 그들을 격퇴시킬 것입니다." 맥아더는 마오쩌뚱의 군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맥아더에게 중공군은 주먹밥으로 연명하면서 얼마 되지 않는 조악한 총과 잘 터지지 않는 폭약에 의지한 채 조락노와 대나무를 든 농노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사이즈 2021, 76-83).


트루먼은 정치적 치명타를 각오하고 맥아더를 해임했다. 수백만명의 인파가 맥아더의 귀환을 환영했다. 여세를 몰아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에서는 대통령이 죄없는 맥아더를 부당하게 해고시켰다는 주장을 하면서 의회 청문회가 열렸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 맥아더에 대한 동정론이 팽배했다. 트루먼의 인기는 곤두박질을 쳤다. 진실은 밝혀졌다. 청문회 과정에서 맥아더는 처음부터 중공군의 개입을 몰랐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참모들은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보고했다는 증언을 쏟아냈다. 영웅이 하루 아침에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그의 말처럼 노병은 그렇게 사라졌다.


다시 장진호로 돌아가자. 장진호는 인공호이다. 장진강에 흐르는 물을 모아 댐을 만들었다. 일본은 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중국과 아시아 전역에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가 필요했다. 일본은 함흥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낭림산맥의 고지대 계곡을 물로 채워 대형댐을 건설하고 수력발전소를 가동시켰다. 장진호는 일본 제국주의의 약탈과 탐욕을 실현하는 전초기지로 둔갑했다. 일제는 함흥과 인근 흥남을 군사 및 산업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함흥과 흥남은 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하여 정유, 화학, 직물, 금속주조, 군수 공장 등이 들어섰다. 이 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와 수은산화물과 고옥탄 항공연료를 생산했다(사이즈 2021, 110-111).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동북부 지역은 유엔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반면 중공은 유엔군의 주력 부대가 입록강을 도하하기 전 막아야 할 곳 역시 장진호 주변의 산악지대였다. 군사 전략적으로 쌍방 간에 일전이 불가피한 전쟁터다. 1950년 11월 장진호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강추위가 더해져 산야가 바윗돌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밤에 강풍을 동반할 때는 기온이 3, 40도까지 떨어졌다. 어느 정도 추웠을까. 겪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땅은 시멘트 덩어리처럼 단단했다. 장진호에 주둔한 미해병 1사단 병사들이 착용한 동계전투화나 방한피복은 알래스카의 혹한지대에서도 견딜 수 있는 첨단 제품이었지만 장진호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렸다. 미국의 따뜻한 남부에서 온 병사들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 폭한은 대포의 발사속도도 늦춰졌다. 작동 부분이 원위치로 되돌아가는 시간이 더 길어진 이유에서다. 소총 용수철이 얼어 사격이 제대로 안될 정도였고 손이 총신에 그대로 달라붙어 조준이 힘들었다. 수류탄 안전핀도 제대로 뽑히지 않았다. 전투 식량을 얼음 상태로 먹은 병사들은 장염에 시달렸다(고산 2007, 70-77). 포로가 된 중공군들 중에는 동상으로 귀 또는 코가 떨어져 나간 부상자들도 있었다.


1950년 10월 19일 중공의 인민지원군은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했다. 중공의 개입 명분은 단순명확하다.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그래서 중국인민항미지원군이다. '지원군'이란 이름은 모택동이 정규군을 파견하지 않았으니 미국에 공식적인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는 정치적 수사였다. 펑더화이(彭德杯) 중공군 총사령관은 이렇게 비유했다 "미국이 오직 강에 의해 중국과 분리된 한국을 점령하면, 중국 동북부가 위험해질 것이다. 미국은 언제든지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일 구실을 찾으려 할 것이다. 호랑이는 인간을 잡아먹고 싶어한다. 언제 먹을지는 호랑이의 식욕에 달려있다. 어떤 양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중공군 사령관들의 비유는 보다 실질적이다. '미국은 중국이 멕시코를 침공해 텍사스 국경까지 진군하는 시나리오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가 정확히 이곳의 상황이다.'(사이즈 2021, 84-85 재인용).


중공은 6.25의 전황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언제 어떤 전황에서 개입해야 할지를 자로 재고 있었다. 유엔군의 대응이 궁금하다. 북한으로 진군한 한국군을 비롯한 전장의 지휘관들은 중공군의 개입 징후와 정보를 곳곳에서 포착하고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하였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은 없을 것이다'라는 전제하에 전쟁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미군의 책임자였던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대표적인 맥아더 충성파)는 숫제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였다. "중공군이 참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다른 잘못된 느낌을 전하는 것을 중단하라"라고 권고할 정도였다(사이즈 2021, 105). 유엔군의 수뇌부는 중공군은 참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증편향의 덫에 갇혀버렸다. 뭐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다. 다행히 미군에는 중공군의 출현과 전략을 미리 헤아리고 준비한 사람이 있었다. 미해병대 1사단장 스미스 장군이다.


스미스 장군은 함흥의 산악지대에 출몰하는 중공군과 지형을 관찰한 결과 중공군이 미군을 유인하는 간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사령부가 자기확신과 교만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앞을 내다 보는 상황 판단을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응하였다. 그는 공활지를 찾아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하고 병참을 확보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 활주로를 통해 탄약, 음식, 의약품, 연료 등 보급품이 도착했고 부상병들을 이송할 수 있었다. 만약 이 활주로가 없었다면 유엔군은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을 지 모른다.


장진호는 미군과 유엔군의 무덤이었다. 그들은 중공군이 파놓은 호랑이굴로 걸어갔다. 중공군은 계절적 요인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적심입(誘敵深入)의 계략을 펼쳤다. 강한 적을 맞이해서는 일부러 패배를 가장하고 지역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적을 포위망 속으로 깊이 끌어들이는 전법이다. 삼국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략이다. 맥아더 사령부의 오판과 전장에서 수집된 정보를 무시한 결과였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이 군대의 지휘체계지만, 잘못된 목표설정과 곡해된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명령이 초래한 불상사였다. 사령부의 실수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했다. 지휘관의 오만과 허영심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는가에 대한 방증이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으로의 철수 과정에서 보여준 유엔군의 사투에 대한 여러 미담이 전해진다. 전투 자체로보면 유엔군의 명백한 패배요 후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장진호 전투와 이어진 흥남으로의 퇴각 과정에서 미해병 1사단을 제외한 미육군과 한국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군사학자들은 장진호 전투를 '전략적 후퇴'라고 평가한다. 열흘 간의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은 1천 29명 전사, 4천 582명 부상, 중공군은 3만 4천명이 전사하고 3만명이 동사했다(이상돈 2014, 118). 유엔군은 군사용어로 중공군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다. 유엔군의 중심에는 미해병1사단이 있었다. 중공군은 남하에 필요한 체제를 갖추는 데 6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중공의 주력부대가 남하를 지체하는 사이에 유엔군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대공습을 늦추는 효과도 거뒀다. 이러니 장진호 전투는 패배, 후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묘한 측면이 있다.


중공군의 유인 전술과 인해전술로 사단이 전멸할 대위기에서 스미스 사단장의 리더십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스미스 장군은 철저히 부하의 생명을 중시하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미해병대의 전통과 명예를 지키면서 사지(desperate ground)를 빠져 나왔다. 군단 사령부의 퇴각 속도가 지체되고 있다는 주의를 받으면서도 한 명의 부상자도 남겨두지 않고 챙겼다. 사태의 심각성을 나중에 인지한 알몬드 군단장(스미스 사단장의 직속상관)은 스미스 장군에게 항공을 통한 공수 철수를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했다. 공수철수작전을 펼치게 되면 많은 중장비를 포기해야 하고, 잔류 엄호부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 사람만 항공으로 후송하고 사상자는 사지에 버려두자는 알몬드의 생각과 대비된다. 아무리 전장터이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 리더십의 요체가 아니겠는가. 당장 필요한 것만 챙기고 살수있는 사람만 챙기자는 알몬드와 한 명이라도 더 살려 데리고 갔겠다는 스미스 리더십의 차이다.


스미스 장군이 해병대 부하들의 사기와 명예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는 종군기자단과의 대화에서 고스란히 들어난다. 종군기자단이 "이 작전은 후퇴입니까? 아니면 퇴각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퇴각이란 적에게 몰려 우군이 차지하고 있는 후방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지만, 지금 사단의 후방도 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적의 격파도 우리 사단의 임무 중 하나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Retreat hell, we're just advancing in another direction)." 이 말을 스미스 장군이 아닌 맥아더의 충견 알몬드 군단장이나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들이 했다면 설득력이 없는 허언이 되었을 것이다. 스미스 장군이 이 말을 했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강렬한 메시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어록이 아닐까 싶다. 전황을 어떤 시각에서 정의내리고 이를 메시지화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그의 인터뷰는 병사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해병대 1사단의 생존과 귀환을 기대하는 미국인들에게도 희망을 주었다. 자식을 전장에 보낸 미국 부모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다리던 말이겠는가. 좌절이 용기로 패배감이 안도감과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언어는 늘 공명한다. 다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말을 해야 한다.


영웅은 만들어진다고 한다. 만들어진 영웅은 시간이 흐르면서 통념과 신화가 되어 사람들의 머리속에 각인되어 버린다. 역사의 준엄함과 통절함이 필요한 때가 있다. 진실이 베일을 벗는 순간이다. 가려졌던 진실이 커밍아웃하는 데 문제는 시간이다. 전쟁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전쟁이 정치화되는 것이다. 프로파겐더에 능숙한 정치꾼들은 참전 용사와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하게 하려고 한다. 올리버 P. 스미스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전쟁 수뇌부의 오만함과 허영심에서 빚어진 위기상황을 유비무환의 전략과 선제적 대응으로 극복해냈다. 스미스 장군이 장진호 전투에서 발휘한 리더십의 요체를 보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침략에 미리 준비하는 모습을 데자뷔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싶다. 스미스 장군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부상자와 전사자 시신까지도 후송시켰다. "해병은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라는 전통을 확인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이것이 리더십의 시작이다.


고산. (2007). <얼어붙은 장진호>. 동서문화사.

사이즈, 햄프턴. (2021).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 박희성 옮김. 플레닛 미디어.

이상돈. (2014). <美해병대, 한국을 구하다>. 기파랑.

중앙일보. (2020).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우리는 장진호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위대한 승리였다">. 12월 7일.

Shisler, Gail. B. (2009). For Country and Corps: The Life of General Oliver P. Smith. Annapolis, ML: Naval Institute Press.

영화 <장진호 전투> (1952)

국방 TV 다큐멘터리 <1950년 혹한의 겨울_장진호에서 흥남까지>

다큐멘터리 <The Battle of Chosin>(2016)


keyword
이전 08화인연이 역사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