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철옹성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교훈

by 염철현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검증된 최고의 정치 체제라고 한다. 이른바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의 대표를 통해 정치 행위의 정당성을 담보한다. 민주 국가에서 대의(代議)라는 의미는 법률적으로 과반수를 의미한다. 과반수를 차지한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 교육감, 국회의원이 전체 국민 또는 지역주민을 대표한다. 과반수 룰은 민주주의 운영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약속한 정치 공학적 용어다.


대한민국에서 평화적인 정권 교체나 정권 이양은 정상적인 정치 프로세스로 자리 잡았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군부 쿠데타 또는 불법 선거로 정권을 탈취하거나 정권을 유지하려는 초헌법적인 편법과 억지가 판을 쳤던 때도 있었다. 역사는 증명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우리 역시 민주 제단에 숱한 피를 바치고 되찾은 항쟁의 민주주의다. 역사는 일천하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우리 국민의 자긍심이다. 정치판이 3류 소설만도 못하다고 하지만 미국의 2020년 선거 결과와 정권 이양 과정을 보면 한국 정치에서 정권교체만은 선진국이다.


2020년 이후 코로나 역병의 창궐로 세계가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지만, 진즉 변이 바이러스가 미국 민주주의를 감염시켰다. 전 세계에 인권과 민주주의의 소프트 파워를 수출하는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와 정권교체를 놓고 보여준 폭력과 야만성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오명을 남긴 대사건이었다. 국회 의사당에서 의원들끼리 폭력을 휘두르고 점거 농성을 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백주대낮에 시민들이 의사당을 불법 점거하고 난동을 부리는 행태는 기억에 없다. 대부분 폭도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화당 소속 당원이거나 현직 공화당 의원도 참가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국 민주주의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날이었다.


어떤 정치체제도 완전할 수 없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데 어떤 제도인들 완전하겠는가. 21세기에도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사유화하면 왕과 같은 존재가 된다. 헌법에서 임기가 보장된 선출직 대통령의 무소불위의 행동을 저지하기도 어렵다. 삼권분립이 헌법에 정해져 있더라도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독주, 독재, 독선에 브레이크를 걸기 어려운 구조다. 트럼프라는 정치적 아웃사이더를 통해 혹독한 학습을 했다. 미국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나약한 실체라는 것을 확인했다.


미국 민주주의가 검증의 도마 위에 오르는 데에는 트럼프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트럼프가 그만의 정치적 행위를 하도록 만든 모든 미국인이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정치인은 유권자의 표를 자양분으로 한다. 셀프 이임식에서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형태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7천 4백만 표를 획득하고도 패배한 정치인이 느끼는 유혹이다. 트럼프 같은 인품 소유자가 패배를 쉽게 인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표일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후임 왕세자에게 남긴 어록이다. "국왕은 깊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다. 깊은 바다는 백성이고 백성이 바닷물을 출렁이면 떠있는 배는 가라앉는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국가이든 왕조시대이든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가 아닐까 싶다.


트럼프는 지난 4년간 배양한 트럼피즘(Trumpism)이라는 바이러스 숙주를 남겼다. 이 숙주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킬지 모른다. 이 숙주는 사람이 모인 곳에서 비말을 통해 전염시키는 것이 아니다. SNS 등 인간이 만든 네트워크를 타고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된다. 생물학적 코로나 바이러스와 이념적 트럼피즘 바이러스가 미국 민주주의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트럼피즘의 숙주는 분노, 증오, 분열, 갈등, 극단주의, 불법, 폭력, 폐쇄성, 혼란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변이를 일으킨다. 변이 속도가 빠르고 독성이 강해 퇴치하기란 쉽지 않다. 통합과 치유를 국정과제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바이든 행정부에게 기대는 하지만 쉽게 치유될 병도 아니다. 트럼프의 최대 치적은 250년 역사의 미국 민주주의가 앓고 있었던 증상들을 세상에 들춰낸 것이다.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미국 민주주의의 좀비들을 지구적으로 알린 것이다.


미국은 모자이크와 태피스트리의 이민 국가이다. 다원성과 다양성이 국가 발전의 근원이고 통합의 구심점이다. 이런 국가에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같은 일방 통행적이고 폐쇄적인 이념적 틀이 국정철학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념의 올가미가 되어 버린다. 역사의 소중한 교훈이다. 지도자의 확증 편견과 권력의 사유화가 초래한 엄청난 정치적 비극은 한순간에 국가의 정체성과 도덕적 정당성을 송두리째 짓밟는다. 민주시민이라면 국민을 이념으로 편을 가르고 민감한 이슈를 꺼내 증오와 분노를 부추기는 지도자를 뽑지 않아야 한다. 나치 정권도 독일 국민의 선택으로 집권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나약하고 깨지기 쉬운 유리 같다. 민주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보호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성채는 무너지고 깨져버린다. 민주주의는 철옹성이 아니다. 허물어지고 뚫린 민주주의 성채를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이다. Caring for Democracy.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한 뒤 남긴 어록을 인용했다. "내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다. 내 모든 영혼이 이 선언문에 담겨있다." 바이든 대통령도 "미국인과 국가를 통합하는 데 자신의 모든 영혼을 바치겠다"라고 다짐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통합과 치유의 백신 접종에 성공하기 바란다. 세계 민주주의를 위한 백신이기도 하다.


22세 흑인 청년 계관 시인 어멘다 고먼(Amanda Gorman)은 바이든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축시 '우리가 오를 언덕(The Hill We Climb)'에서 이렇게 낭독했다. "빛은 항상 존재한다. 우리들이 그 빛을 보려는 용기, 그 빛이 되려고 하는 용기만 있다면..."


For there is always light,

if only we’re brave enough to see it,

if only we’re brave enough to be it.


젊은 시인이 민주주의의 위기와 지구적인 감염병에 대한 처방전을 내놓았다. 맞다. 빛은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빛을 직시하듯 문제를 정면에서 맞닥뜨려 해결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트럼프즘의 분열과 증오를 증식하는 만용이 아니다.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인간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지혜를 갈구하는 진정한 용기이다. 글로벌 문제는 글로벌 차원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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