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제대로 알고 읽기

<정사 삼국지> vs <삼국지연의>

by 염철현

흔히 <삼국지>라는 부르는 소설 작품의 원래 이름은 14세기에 명나라의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삼국지연의>의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도 부른다. <연의(演義)>란 사실(史實: 義)를 부연(演)하였다는 뜻이다. <연의>가 붙은 것은 <삼국지연의>가 효시라는 점에서 중국 최초의 역사소설이다. 그 후 각 왕조의 역사를 소설화한 작품이 속출하였는데, 그러한 일련의 소설들을 연의체(演義體) 소설이라고 부른다(이문열 2002, 382).


소설의 토대가 된 것은 280년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이다. <삼국지연의>는 오랫동안 민간에서 전해 내려온 화본(話本)이나 설화, 희곡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살려서, 최종적으로 나관중이 정리, 가필, 창조된 영웅담이며 전쟁 서사시이다. 또한 은연중 민중 사이에 퍼졌던 촉 정통 사상과 자신의 촉 정통론을 융합시켜 연의체 소설의 새로운 문학 장르를 확립하였다(이문열 2002, 389).


<삼국지연의>가 워낙 대중적이다보니 <삼국지연의>를 <정사 삼국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사 삼국지>는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정사로서 중국 후한말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시작으로 삼국정립, 후한의 멸망과 위의 성립, 촉의 멸망, 위에서 진(晉)으로의 정권 이양, 오의 멸망까지를 다룬다. 중국 고대사에서는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와 함께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고 있다. <정사 삼국지>는 모두 65권으로 구성되었다. <위서> 30권, <촉서> 15권, <오서> 20권. 권수로만 보아도 위나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진수 2018, 10-16). 진수는 호칭에서도 삼국에 차별을 두었다. 본기(황제의 전기)는 위의 황제들로만 엮었으며, 촉과 오의 황제는 열전에 편입시켰다. 무제(武帝, 조조), 명제(明帝, 조예) 등의 제호(帝號)를 붙인 것은 위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로 기술하였고, 오의 제왕들은 주(主)를 붙이거나 심지어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삼국지연의>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보급되었지만, 특히 동아시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에서도 소설 삼국지의 판본이 수십 종류에 이른다. 이 중 이문열의 삼국지가 2천만 부가량 팔렸으며, 황석영 삼국지는 200만 부 정도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판본을 모두 합치면 엄청나게 팔렸을 것이다. 판본이 나오기 무섭게 사들여 수집하는 마니아들도 있다. 일본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삼국지가 대히트를 했다. 삼국지의 고향 중국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판본이 팔렸다. 워낙 많은 판본과 아류가 섞여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와 비교할 때 <삼국지연의>에서 허구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궁금하다.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에게는 허구로 판명된 인물과 명장면을 보면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하는 장면,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는 장면, 왕윤이 초선을 이용하는 연환계, 조조가 술을 마시며 유비와 함께 영웅을 논하는 망매지갈 이야기, 관우가 천리길을 단기로 달리며 다섯 관문의 다섯 장군을 베는 장면, 유비가 삼고초려하여 제갈량을 영입하는 과정,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하는 장면, 적벽대전에서 화살을 빌려오는 장면과 황계의 고육책, 제갈량이 동풍을 불러들이는 장면,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살려주는 장면, 제갈량과 주유의 기싸움 장면, 남만 정벌에서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살려주는 장면, 읍참마속의 장면 등(진수 2018, 11)은 픽션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맥이 풀리면서 <삼국지연의>에 대해 흥미를 잃을지 모르겠지만, 소설에 이 명장면 말고도 독자의 눈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한 장면들은 차고 넘친다.


특히 <정사 삼국지>에서 제갈량에 대한 평가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진수는 제갈량은 위대한 정치가인 것은 맞지만, 훌륭한 군사전략가의 역량을 갖추지 못해 전쟁에 능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러니 진수가 고의로 제갈량을 폄훼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갚았다는 설도 있다. 그 근거로 진수의 부친이 마속의 참군으로 마속이 참형을 당할 때 그의 부친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머리카락이 깎이는 곤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결부시킨다. 허쯔취안(2019)은 진수의 제갈량에 대한 평가는 공정했다고 진수를 옹호했다. 허쯔취안에 따르면 제갈량은 유비가 생존했을 때는 정치 방면의 주요 참모였지만, 군사 방면은 전적으로 유비가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제갈량은 유비 사후에야 비로소 촉한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전권을 맡았다(허쯔취안 2019, 383).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면에 대한 진위 여부는 이 정도로 하고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고 넘어가자.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위, 촉, 오 중 한나라를 계승할 정통성을 가진 나라를 어떤 국가로 생각했을까? 대부분의 독자들도 오나라는 제켜두고 위나라 혹은 촉나라 중에 선택하겠지만, 한나라의 황족 출신인 유비가 세운 촉나라에 조금 더 표를 주지 않을까 싶다. 촉에 표를 던진 사람들은 <삼국지연의>의 기획 의도에 말려들었다고 보면 된다. 진수는 위나라를 한나라의 정통을 계승할 나라라고 보았다. 왜 그랬을까? 진수(233~297)는 촉나라에서 태어나 벼슬까지 지냈지만, 그의 나이 31세 때 촉이 위에 멸망당하면서 망국의 백성이 되었다. 사마씨 가문이 위를 멸망시키고 265년 진(晉) 나라를 세웠을 때, 진수는 진에서도 다시 벼슬을 하였다. 진수는 진의 전신인 위를 한나라를 계승할 정통 국가로 보았다. 285년 진수가 진에서 벼슬을 하면서 <정사 삼국지>를 완성했다는 점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역사의 부침과 함께 한나라를 계승하는 국가의 정통성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명대 나관중(1330?~1400)이 쓴 <삼국지연의>에서는 한나라를 계승할 정통 국가로 촉을 부상시켰다. 이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의 본질과는 다른 방향에서 집필되었다. 명대에는 존유반조(尊劉反曺), 즉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깍아내리는 기조 아래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전혀 다르게 묘사하였다. 졸지에 유비가 부상하고 조조는 간웅으로 폄훼되었다. 이 대반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송나라의 주희(朱憙 1130~1200)다. 주희는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하였고, 그의 사상은 중국을 비롯 동아시아의 통치와 생활 규범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당대 가장 강력한 인플루언서였던 주희가 <자치통감 강목>에서 촉나라를 정통으로 보았으니 더 논할 것도 없게 되었다. 결국 명대에 이르러 이민족에 의해 훼손된 중화사상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로 쓰인 민족주의적 작품이 <삼국지연의>로 볼 수 있다. 이른바 국가 주도의 기획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정사 삼국지>와는 다른 허구적인 명장면들이 소설에 등장한 이유이다. 청나라 역사학자 장학성이 <삼국지연의>는 칠실삼허(七實三虛), 즉 7할은 사실이고 3할은 허구라는 말을 괜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송대(宋代)에 <정사 삼국지>가 지나치게 간략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배송지(裵松之 372~451))를 시켜 주(注)를 만들게 하였다. <삼국지주(三國志注)>다. 배송지는 <삼국지주>에 140여 종의 사서를 인용하여 본문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풍부한 일화 등을 추가하였다. <삼국지주>는 <삼국지연의>가 최고의 대중서로 탄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할 것이다(이문열 2002, 367). 더 주목할 것은 배송지의 아들 배인(裵駰)이 사마천의 <사기>의 주석본인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저자로 알려져 2대에 걸쳐 역사서를 주해한 사실이다.


<삼국지연의>는 우리나라에서도 폭넓게 읽힌 것으로 생각된다. 16세기 초 조선에 전해진 <삼국지연의>는 16세기 말 국내에서 원문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삼국지연의>를 번역하거나 번안한 작품들도 상당수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지식층에 속하는 사대부뿐만이 아니라 민간에도 보급되었음을 나타낸다. <삼국지연의>는 조선의 시조나 소설, 속담 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삼국지연의>가 지배계층은 물론 부녀자나 민간인에게까지 널리 읽히고 확산된 것은 이 작품이 조선의 유교적 지배체제가 강조하는 이념, 즉 충효와 의(義)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자기 나라에서 충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우(關羽)를 모시는 사당을 조선에도 짓도록 강요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관우 사당이 서울 종로구 소재 동묘(東廟)다. 임란 후 1600년에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건립되었는데, 신종은 임란 당시 일본군을 철퇴시킨 것은 관왕(關王)의 영현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여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에게 칙서와 사천 냥을 보내 짓게 했다.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며 관왕을 관제(關帝)로 숭상하는 의미로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최명 1994, 216-219). 동묘는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에 대하여 무장을 모시는 무묘(武廟)이다. 조선시대는 동관왕묘 외에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남관왕묘(南關王廟), 북묘, 서묘를 세워 관우를 숭상했다.


명나라는 조선 왕에게 관우묘에 분향을 강요했다고도 한다. 이러니 조선 조정에서는 관우묘가 조성된 후 아예 출정하는 무장들에게, 또 무과에 급제한 무인들에게 관묘의 참배를 의무화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충효와 의의 본보기가 된 무인들이 많은데 삼국지의 관우를 모델로 삼은 데는 약소국이 감당해야 할 사대외교의 아픔이다. 그러나 동묘는 재평가, 재인식 되어야 마땅하다. 엄연히 <정사 삼국지>는 명대 이후 관우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과대 포장되었는가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역사가 사실(史實)에 기초하지 않으면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다.


인간의 상상력이 꽃을 활짝 피우기 위해서는 배경과 무대를 필요로 한다. <삼국지연의>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배경과 무대를 제공하였다면, 배송지의 <삼국지주>가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삼국지연의>의 판본(최초의 판본은 1522년)은 계속 생성되고 있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경극, 게임, 판타지 등 다방면에서 문화예술 콘텐츠로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면 좋겠다. 아무리 소설 삼국지를 흥미롭게 읽는다고 해도 그 원형이 되는 <정사 삼국지>도 기억하고 참고하면 좋겠다. 그렇게 했을 때 중국사에서 일곱 푼의 진실과 세 푼의 허구의 차이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세 푼의 진실과 일곱 푼의 허구라고도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관중. (2002). <삼국지>. 이문열 평역. 민음사.

진수. (2018). <정사 삼국지-위서, 촉서>. 김원중 옮김. 휴머니스트.

최명. (1994). <소설이 아닌 삼국지>. 조선일보사.

허쯔취안. (2019). <위촉오 삼국사>. 최고호 옮김. 역사 모노그래프.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동관왕묘(東關王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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