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신부
2019년 12월 추운 어느 날이었다. <천년의 화가, 김홍도>를 집필한 이충렬 작가가 미국 애리조나에서 한국에 왔다. 경복궁 옆 '역사 책방'에서 준비한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위해서다. 일정은 김홍도가 살았던 집터를 답사하고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고 독자와의 Q&A로 진행되었다. 작가는 김홍도의 집터로 알려진 자하문 터널 위(옛 지명은 백운동)로 일행을 안내했다. 당시 중인 계급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작가는 김홍도의 집필 배경에서부터 사료 고증의 어려움 등을 설명했다. 마무리 멘트에서 이제는 이태석 신부(1962-2010)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가야 한단다. 이태석 신부의 존재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2021년 12월 이태석 신부의 전기(김영사)가 출간되었다.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 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이충렬 작가에게 집필을 요청했다. 김수환 주기경 전기를 쓴 인연과 관련되었으리라. 이충렬 작가는 우리나라 역사 인물에 대한 전기 작가로 이름이 높다. 그가 집필한 인물은 김수환(추기경)을 비롯하여 전형필(문화재 수집가), 백충현(국제법학자), 권정생(아동문학가), 최순우(박물관장), 김환기(화가)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다. 글이 간결하고 담백하다. 역사에 숨겨진 이면을 밝혀내 사료를 고증해낸다. 철저히 팩트 중심의 전기다. 인물의 행동과 업적을 포장하려고 하지 않고 검증된 사료나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조명한다.
이태석 신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태석 신부는 81학번으로 동갑내기다. 81이라는 숫자와 동년배에서 비롯된 묘한 동질감이 발동한다. 사람에겐 숙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이태석은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마다하고 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1992년 광주가톨릭대 신학과에 편입하여 사제 양성 교육을 받고 1994년 살레시오회 수도자로서 첫 서원을 받았다. 이후 국내에서 사목 실습을 하다 1997년 로마 교황청이 설립한 살레시오대로 유학을 떠났다. 2000년에 이탈리아 토리노 살레지오 수도회에서 종신 서원을 받고 2001년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Tonj)에 선교 사제로 부임하였다. 수단과 인연이 된 것은 1999년 선교 체험으로 간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인은 '아프리카 성자'로 추앙받는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와 닮은 점이 많다. 슈바이처 역시 의사이면서 신학자이고 목사였다.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오르간 연주회를 가질 정도였다. 이태석 신부는 가난했던 어릴 적 부산 부민동 송도성당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풍금을 혼자 익혔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고인은 고등학교 시절 성가 '묵상'을 작사, 작곡했다. 대학에서도 실내 합주단 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가 톤즈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에게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키고 브라스밴드를 조직한 것은 '다 계획이 있어서였다.' 음악으로 상처를 어루만지고 희망을 되찾아 주고자 하였다. 고인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한센병 환자들이 발의 피부와 뼈가 기형적으로 변형되어 맨발로 다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발의 모형을 직접 그려 맞춤형 신발을 만들어 신겼다. 의사이면서 선교사이고 교육자이면서 음악가였던 고인을 수단의 슈바이처로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 기념사업위원장(안정효) 역시 고인과 동기로 81번이다. 안 위원장은 고인이 수단에서 활동할 때 주고받은 메일과 편지를 언론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개했다. 고인이 환자에게 약을 주면서 "하루 3번 식후에 복용하라"라고 했더니 알아듣지 못했다. 하루에 한 끼도 먹기 어려운 데 세 끼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은 단어였다. 2002년 이태석 신부가 안 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한센병 환자에게 한 달 치 약과 함께 강냉이와 식용유도 나누어 주는데, 이것 때문에 한센병 환자이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다. 한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왔길래 검진해보고 한센병이 아니어서 '다행합니다!'라고 했지. 모녀는 기쁨 대신 실망으로 가득 찼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살짝 불러 강냉이와 식용유를 주어 보냈다." 현장에 있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시추에이션이다. 우리들이 사는 현실에서는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언어들이 그곳에서는 비현실적인 생각이고 존재하지 않은 언어이다.
2020년 노벨평화상은 세계식량계획(WFP)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는 “코로나 백신을 찾을 때까지는 이 혼돈에 맞설 최고의 백신은 식량”이라고 했다. 기아와 빈곤으로 고통받는 국가가 한 둘이 아니지만 북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가슴 아픈 일이다. 후진국의 기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류애니 세계 평화니 초연결시대니 하는 말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부의 양극화는 곧 식량의 양극화다. WFP는 잉여 농산물을 활용해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기아 문제를 해결해, 궁극적으로 아무도 굶지 않는 ‘제로 헝거(Zero Hunger)’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 이 목표가 하루빨리 실현되기 바란다. 세계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다음이 '인류 공동체 구현'이라는 거창한 구호다.
이태석 신부의 썰렁한(?) 유머를 자주 인용한다. '우리 민족 가요 아리랑, 아리랑의 어머니 이름은 무엇인가?' 난센스지만 울림이 있다. 정답은 '아리리'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알고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고 행동에 옮기려는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고인의 얼굴을 보면 듬직하면서도 유달리 해맑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라는 대사와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웬만한 직장인도 매년 혹은 몇 년 단위로 정기검진을 받는데 의사가 난생 처음 종합검진을 받고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자기 몸을 신에게 내맡겨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제의 신앙만으로 고인의 봉사와 덕행을 평가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모든 신앙인이 이태석 신부처럼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그의 행동이 남다르게 평가받는 이유다.
이태석 신부가 심고 키웠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있다. 톤즈의 후예들이다. 이들은 의사가 되거나 엔지니어가 되어 고국에서 의료 봉사와 국가 인프라 건설에 앞장서고 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태석 신부님을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2018년 인제대(고인의 모교) 의대를 졸업한 남수단 출신 유학생 토마스 타반 아콧(33)씨가 졸업식에서 한 말이다. 국내에서는 '이태석 봉사상'이 제정되었고 '수단어린이장학회'가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를 주제로 한 전기, 영화, 다큐멘터리가 집필, 제작되고 있다. 우리 사회와 전 지구촌에 그가 전파한 선한 바이러스가 널리 퍼지기 바란다.
가톨릭 신문 2018년 1월 21일. "부산 인제대 의과대학 졸업한 남수단 톤즈 출신 유학생 아콧씨, 이태석 신부님 뜻 이어 봉사하는 의사 되고 싶어요.”
이충렬. (2021). <신부 이태석>. 김영사.
다큐멘터리(2010). "(Don't cry for me 울지 마, 톤즈)."
조선일보 2020년 1월 18일. "아무튼 주말,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 기념사업위원장 안정효 인제대 의대 81학번 동기"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