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Nov 02. 2021

16세기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② 루터의 종교개혁: "인간은 신을 선택할 수 있는가?"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대 궁정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쓴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 반박문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면죄부’ 남발에 대한 토론을 요구하는 글이다. 루터는 7세기부터 통용되어 오던 세속적 처벌에 대한 ‘사면’이 교회와 성직자의 축재를 위해 남용되어 ‘면죄부’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고백성사’와 같은 교회의 권위를 통한 참회가 아니라 진정한 영적 회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교황은 성베드로 성당 건축비와 교회 재정확충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의 행위에 대해 반발한 루터는 교황조차 어떤 죄도 사(赦)할 수 없는 것이고, 신앙과 불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은 성서뿐이며, ‘진정한 기독교인’이면 누구든지 교회의 모든 영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반박문은 들불처럼 타올라 유럽 전역에 번졌으며, 루터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범기독교의 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루터의 반박문이 많은 대중에게 전파되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1450년경)의 기여가 컸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활자(한자)는 세종 16년의 갑인자(1434년)로, 서양보다 16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인쇄물 덕분에 루터의 반박문은 독일어로 번역, 보급될 수 있었고 그의 저술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성직자만이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었던 시대에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일반 평민들도 문해 능력이 향상되어 웬만한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은 인쇄물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의 교황에 대한 반박문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제국들 간에 전쟁을 불사하는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양산하였고,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를 통해 루터교가 인정받게 되었다. 절반의 신앙의 자유다. 당시 유럽은 신앙 속지주의를 채택했는데, 영지 내 주민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가 봉건영주에게 있다. 따라서 영내 사람들은 영주가 믿는 종교를 따라야 다. 아우크스부르크화의에서는 “영주에게 종교도 속한다”는 표어 아래, 가톨릭과 루터파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는 자유를 영주에게 인정하고, 그 영지 내 주민들에게 그들 영주가 결정한 종교를 강요하였다. 영주의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 주민은 재산을 팔고 이주세를 내면 영지 밖으로의 이주는 보장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500년이 넘었다. 독일의 한 젊은 성직자가 교황의 리더십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인류 정신사에 변곡점을 만들었다.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루터로부터 본격화된 종교개혁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신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되며,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에 따라 개인도 신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게 된다. 개인이 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는 데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 이후 약 100년을 더 필요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16세기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