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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02. 2021

16세기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④ 임진란: “역사는 반복된다.”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고자 하니 조선의 길을 빌려 달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해왔다.  1592년 임진란이다. 당시 일본은 전면적 개방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았지만 제한적으로나마 유럽의 포르투갈 등과 무역을 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켰다. 임진란 당시 조선군의 예봉을 꺾었던 조총 역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가져왔던 신식 총기다.


신식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조선반도를 유린하면서 왕조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 신세였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북상하는데 보름 안팎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파죽지세였다. 조선 왕 선조는 파천(피난)을 거듭하면서도 유능한 신하와 장수를 파면하는 무능하고 나약한 리더십으로 일관했다. 다행하게도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해군의 활약으로 삼남의 곡창지대를 지켜냈다. 만약 삼남(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곡식들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전쟁의 판도는 또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사헌부에 보낸 편지에도 삼남의 중요성이 담겨있다.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은 유비무환의 정신과 지형지세를 이용한 치밀한 군사전략의 결과였다. 이순신 장군의 문무겸전의 인문적 소양과 의식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2척의 배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첩을 일궈낸 명량(鳴梁) 해전은 ‘울돌목’이라는 지형과 특성을 십분 이용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군사전략을 세우면서 현지 주민들과 충분히 교감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 전략을 수립했다. 겸허한 경청(humble listening)은 나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나 무기만으로 결정되는 아니다. 지휘관은 민심을 경청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을 때 조선이 믿는 것은 군신관계를 유지해 온 명나라의 원군이었다. 당시 명나라 국력이 하강기에 접어들었고 국내외적으로도 어수선하고 불안한 때였다. 국내적으로는 반란이 거듭되었고, 북으로는 만주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며 명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일본군이 함경도까지 진격하고 나서야 파병 원군을 보냈고 조선에게는 재조지은의 나라가 되었다. 우여곡절을 극복하면서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기에 이른다. 평양성은 임진강 북쪽 핵심 군사요충지라는 점에서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평양성 탈환의 일등공신은 무엇보다 명나라의 우수한 대포였다. 조총백병전에 익숙한 일본군은 장거리에서 대포 공격을 하는 명나라 군에게 약점을 보였다. 사기가 오른 명군은 송추 벽제관까지 일본군을 추격했지만, 일본군의 매복 전에 말려들어 패하고 만다. 대포를 주력으로 하는 명군 일본군을 추격하면서 무거운 대포를 이동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대신 일본군은 신속하게 후퇴하여 매복 전술을 펼칠 수 있었다. 벽제관 전투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가 된다. 쌍방이 교전을 통해 서로의 장단점을 알게 되었다.


이후 조선반도는 일본군과 명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산야는 처잠하게 유린되었고 백성의 피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본군은 침략자로서 반도의 백성을 유린했지만, 명군은 주둔지에서 주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이유로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피침략국의 나라와 백성을 도와주러 온 원군도 침략자 못지않았다. 직접 당해본 백성들의 판단이 맞다.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왜군이 적군인지, 명나라 군대가 적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명군의 행패와 약탈이 그만큼 심했다(류성룡 2021, 194). 참빗은 가늘고 촘촘하여 한 번 빗으면 남는 게 없을 정도다. 백성들은 명군의 수탈과 민폐를 절묘하게 비유하였다. 


이후 명군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철군의 명분을 찾는데 분주했다. 전쟁다운 전쟁은 삼남의 바다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해군과 함대가 아니었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결과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꿨다. 침략자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그의 부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막부 체제로 바뀌었다. 명나라는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 파병 결정을 했는데, 이 결정은 명의 운명을 단축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명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후금(이후 청)을 수립했다.


여기까지가 임진란에 얽힌 약사이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다시 들추는 것은 그 역사를 반복하지 말고 경계하자는 것이다. 악보의 되돌이표처럼 역사도 반복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임진란 발발 훨씬 전부터 선은 철저히 국내외 환경을 무시하거나 무지했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간파하고 이를 대비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 의도와 힘을 무시했다. 조선 위정자들은 일본을 왜구로 폄하하고 그들이 힘을 키우면서 침략할 것이라는 여러 징후들을 무시했다. 당시 조정에서 신하들의 대화 기록을 보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비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기보다 어떻게 무시하고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았다. 고의적 부작위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나라와 백성을 대표하는 이런 왕이나  관료들에게 국가의 안위를 기대할 수 없다.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문명과 문화에 관한 상대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기야 조선사절단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이 조선의 지적 자산과 문화에 대하 여준 모습에서 일본인을 삼류 취급했을 것이다.


일본은 꾸준히 외국과 교류하면서 국내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조선과 일본이 외국인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근세에 양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일본은 표류하여 도착한 외국인들을 정중하게 대하면서 그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하물며 지방관리가 외국인을 심문하는 질문도 매뉴얼화되어 있을 정도였다. 조선은 표류해 온 외국인을 죄인 다루 듯 심문하고 그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박연(네덜란드 이름은 ‘벨트브레’)처럼 조선에 표류, 귀화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도 있지만, 하멜의 경우에는 10여 년을 노예처럼 일하다 조국 네덜란드로 탈출했다. 그가 작성한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서 노동을 했지만 지불받지 못했던 임금을 받기 위해 저술했다고 한다.


임진란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조선의 상국 명나라의 태도다. 명나라는 벽제관 전투 패배 이후 일본군과 좀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명은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를 줄타기하면서 철군의 명분을 쌓는데 바빴다. 명이 조선에 원군을 보낸 시추에이션은 6.25 때 중국이 북한을 도우려 파병했던 상황과 절묘하게 비슷하다. 중국은 유엔군이 압록강에 진격하였을 때 본진을 파병하여 북한을 도왔고, 남쪽의 임진강까지 내려왔다. 이는 임란 당시 일본군이 함경도까지 진격했을 때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고 이후 임진강의 벽제관까지 내려왔다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임진란의 발발 원인에는 여러 의견과 진단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서양인에 의해 이름 붙여진 '은자의 나라(The Hermit Nation)' 답게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은 고의적 부작위와 일본, 명 등 이웃 국가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부재, 그리고 무능하고 나약한 리더와 파벌싸움이 복합적, 다층적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으로서 국가적 자존감이나 문화적 우월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는 강력한 국방력과 유비무환에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과 G2 국가로서 위상과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중국, 그리고 일본의 군사 재무장 사이에서 운신의 폭이 좁다. 특히 자주국방 등 주권국가로서 할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 반복이 고난과 역경의 어두운 역사가 아니면 좋겠다. 우리는 16세기 동아시아의 격변기에 임진란을 대비하지 못해 국토와 백성이 외부 세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질곡의 역사를 경험했다. 어디 임란뿐이던가. 20세기만 해도 일제강점기, 해방 후 남북 분단과 6.25 등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과 역경은 셀 수 없을 정도다. 16세기 임진란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강국 틈바구니에서 지속적으로 생존, 번영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교훈을 제공한다.


류성룡. (2021). <징비록>. 오세진, 신재훈, 박희정 역해. 홍익출판 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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